사도 바울이 쓴 서신들은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교회들이 각자 끌어안고 분투해 온 매우 실제적인 신학적 이슈들에 관한 ‘실전 처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의 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 역시 그 교회가 맞닥뜨리고 있던 심각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테고요. 읽으면 읽을수록 갈라디아서는 아무 문제 없이 평온하게 신앙생활 하던 신자들에게 발송된 서신이 아니라, 교회와 신앙의 존폐가 좌우되던 상황에 내려친 말씀의 벼락이었습니다. 새하얀 백지 위에 쓰인 교리 모음집이 아닌, 연약한 신자들을 뒤흔들던 ‘다른 복음’에 맞서기 위해 사도가 그의 눈물로 써 내려간 사랑의 편지였습니다. … 무엇보다 저희 모두가 ‘믿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새로운 적용점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의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부요함이 주는 기쁨과 감격은 은혜 위에 더해진 은혜였습니다. 부족하지만 복음을 위한 열정만으로 뭉친 저희 셋이 함께 누린 그 은혜와 감동이 이 책과 더불어 갈라디아서를 묵상하는 모든 독자에게도 동일하게, 아니 더욱 풍성하게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서문」중에서
갈라디아서는 그 어떤 성경보다도 더욱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충족성에 대한 고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쩌면 갈라디아서의 주제 자체가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메시지일 수도 있고요. 저는 갈라디아서의 모든 내용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한 구절이 다음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1강」중에서
예수님의 복음은 율법을 반대하거나 폐기하는 대척점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게 실현한 단계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오해하고 왜곡했던 율법을, 그저 종교적인 규율과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전락시켜 버린 소중한 법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 구원과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는 참된 진리의 법으로 재해석하셨습니다.
---「2강」중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방인 선교가 다른 사람의 뜻이 아니라, 그를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다른 누군가가 그의 사역을 인정해 주는지의 여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다만 바울은 이방인 선교를 예루살렘 교회에도 충분히 소개함으로써 앞으로 계속 확장되어 갈 복음 전도의 사역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열이나 반목으로 발전하지 않게 만들려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 및 다른 사도들과 ‘복음을 위한 연합’을 구축하려 한 것입니다.
---「3강」중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도 무너뜨리는 하나 됨의 교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다시 붙잡았으면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선언은 그 진리 하나만으로 서로 다른 성별과 인종과 계급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한 백성으로 창조해 내는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4강」중에서
율법의 행위가 지닌 유혹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킨 자들로 하여금 종교적 만족감과 더불어 그 규정들을 지키지 않는 이들에 비해 자신은 더 나은 신자라는 은근한 우월의식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면서 자동적으로 율법의 행위들은 그것을 지키는 자들과 지키지 못하는 자들 사이에 선을 그어 버립니다. 신앙이라는 숭고한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결국 사람들을 갈라놓고 차별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지요. 이는 치명적인 유혹인 동시에 위험입니다.
---「5강」중에서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이 바울을 대했던 것처럼, 약한 자를 사랑으로 환대함으로써 하나님의 복이 임재하는 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약함을 정죄하는 율법과 계율이 아니라, 약함을 감싸고 위로하며 채워 주는 긍휼과 자비를 통해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에 율법과 초등학문은 그저 어린 시절의 훈육을 위한 초등교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를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드는 참된 진리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사랑과 자유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7강」중에서
성령의 열매 중 핵심이면서 가장 근원적인 미덕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숭고한 복음적 자기희생(나를 버림으로써 너를 살리는 희생)이라면, 음행은 정확하게 그 반대되는 모든 행위라고요. 다시 말해, 너를 이용하고 희생시켜 나를 살리고 이롭게 하는 가치관, 내 이익과 만족을 위해 타인을 얼마든지 도구로 삼고 착취하는 모든 악한 행동들이 바로 음행의 광의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9강」중에서
죄의 문제 앞에 나 역시 연약한 자임을 깨닫고, 죄를 범한 형제자매를 긍휼히 여기며, 그들보다 내가 선하거나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는 것, 나 역시 남들 앞에 자랑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겸손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이것이 바로 내 짐을 내가 스스로 지는 것이요, 책임감 있는 신자로 하나님과 이웃 앞에 서는 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를 개인적인 영역에서 맺어 가는 하나의 구체적인 모습이지요.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신자들이 이 같은 헌신과 책임의 행동들을 할 수 있기를, 즉 우리 안에서 죄를 범한 지체들과 서로 다투는 형제들을 용서하고 그를 바로잡아 하나님 앞에 회복된 신자로 일으켜 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0강」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한 세상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것이 반대로 나타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십자가는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십자가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사랑으로 증오를 이기고, 긍휼로 폭력을 이기며, 겸손으로 오만함을 이기는 순간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십자가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다 잡힌 반역자의 사형 틀이었고,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나무에 달려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의 부끄러움이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십자가로부터 부활의 새로운 여정을 출발하셨습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수치는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11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