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상을 보는 눈, 세계관
상대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당할 정도다. 그래서 요즘은 모든 사람이 세상을 똑같이 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윤리 문제에도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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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은 돈이나 쾌락, 국가, 결혼, 교육, 도덕, 고통이나 전쟁, 사회계급, 자연, 역사, 예술, 학문, 종교, 교회, 특히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들에서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것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포괄해서 세계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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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세계관의 핵심적 요소: 하나님의 존재
세계관에서 하나님의 존재만큼 결정적인 것은 없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바울이 표현한 대로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는 것이 일관성 있는 결론이다(고전 15:32). 하나님의 존재는 사람의 가치관, 삶과 죽음에 관한 태도, 삶의 목적 등 사람의 모든 중요한 것에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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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존재와 관계해서 무신론과 구별되는 불가지론도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모른다는 입장이다. 이론적 지식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을 잃은 현대 지성인들에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입장이다. 지식인들 가운데는 무신론자보다 불가지론자들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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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과학에 갇힌 세계관
자연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그 지식에 근거한 현대 과학 기술이 인간의 삶을 거의 근본적으로 바꾸게 되자, 사람들은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예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결과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과 신의 존재가 확실하지 않다는 불가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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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산다”라는 속담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자신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지혜를 믿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한다. 그래서 자신의 지혜도 믿고 신적인 존재의 능력에도 의지하려 한다. 이렇게 자신의 지혜와 하나님 사이의 중간을 택하는 것을 성경은 우상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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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순환적 역사관과 선적인 역사관
불교나 힌두교 등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태초’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이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일 뿐, 시작이나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시간과 역사를 다르게 본다. 기독교가 시간을 보는 방식, 역사를 보는 방식이 다른 종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기독교의 역사관은 선적(linear)이고 이방인들의 역사관은 순환적(circular)’임을 지적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모든 철학자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
--- p.104
성경이 ‘태초’라고 말한 것은 순환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선적인 기독교 역사관과 시간관을 말해준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역사관과 시간관이 선적이라 했다. 바로 선적인 역사관(linear view of history)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적인 역사관에서 비로소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순환적 역사관에는 반복해서 동일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발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선적인 역사관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따라서 발전이 가능하다.
--- p.108
6장 창조관 시간관 역사관
다른 신화나 종교에도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것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없는 것으로부터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특별히 강조한다.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사람의 상상력과 지식을 초월한다. 사실 창조에 대한 논의 자체가 우리가 모르는 것을 말한다. 너무 신비로운 것이어서 사람의 지혜로는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불가능한 것이다. 시간이 언제부터 시작이 됐느냐, 공간이 언제부터 시작됐느냐를 물으면, 아무리 유식한 사람이라도 대답할 수 없다.
--- p.122
7장 숙명론으로 기우는 현대 사상
인격이란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자유의지이고, 그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자유의지’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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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숙명론적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한다. 신실하다는 것은 숙명적인 천성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고 양성해서 얻는 태도다.
--- p.159
8장 창조의 질서와 인간의 책임
여기서 주장하려는 것은 자연 질서 그 자체에 우리의 안전 보장을 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 질서 혹은 자연법칙은 확실하니까 그것에 의해 설명하거나 그것에 의해 예측하면 틀림없다는 것에 우리의 믿음을 두지 말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순간순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의 믿음을 두자는 것이다.
--- p.184
9장 고통을 통해 인식하는 악
하나님은 만물을 멋있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만드셨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피조물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그 인간이 아프고 괴롭고 슬프고 불행하게 되었다. 도대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악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어느 종교, 어느 철학도 악이란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
--- p.194
10장 피조물의 고통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주로 약자라는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다. 약자란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뿐이 아니다. 성적, 사회적, 정치적, 인종적, 지역적 약자들도 있다. 그들은 세속화로 말미암아 과거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강자는 과거보다 더 즐길 수 있다. 물론 문화 수준이 높아진 사회에서는 다른 변화들이 강자와 약자의 양극화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긍정적 변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세속화가 양극화를 더 심각하게 만든다.
--- p.217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모든 사람은 동등하지만, 구체적 사회에서는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고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기 쉬우므로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공정을 이룩하는 것으로 본다.
--- p.219
자연이 인간의 죄 때문에 신음하는 것의 최근 형태는 환경오염 문제가 아닌가 한다. 과거에 과학 기술이 현재처럼 발달하기 이전에는 비록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긴 했지만, 자연이 오늘날처럼 착취당하지는 않았다. 자연이 그 자정 능력을 상실해 버릴 정도로 악화하지는 않았다. 요즈음은 종달새처럼 새나 짐승이 완전히 멸종해버리는 상태까지 되었다.
--- pp.225~226
11장 악의 근원
육체가 악의 근원이란 생각과 욕망이 악의 근원이란 관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욕심을 부려야 하는 이유는 몸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몸이 있으니까 먹고 입어야 하고, 그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욕심 때문에 온갖 죄악이 일어난다 할 수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란 표현이 있다. 먹어야 하기에 욕심을 부리고 도둑질하게 되어 그 때문에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 pp.236~237
12장 현대의 우상 숭배
인간의 죄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형태로도 나타나지만, 그와 못지않게 더 심각한 것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십계명에도 이웃에 대한 계명들보다 먼저 하나님과 관계해서 지켜야 할 계명이 언급되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우상에 대한 계명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에 대해 논의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우상 숭배다.
--- p.250
13장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구속
성경이 요구하는바 사회개혁은 거의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면 왜 시도해야 하는가?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가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태도를 ‘선지자적 비관주의’라고 부른다.
--- 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