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사내가 책방에서 소년이 된다. 그동안 세상의 거센 바람 덕분에 거칠 대로 거칠어져 나무껍질 같았던 마음이 맨살을 드러낸다. 아직 자라지 않은 소년의 가슴은 일렁댄다. 그 보드라운 가슴으로 들어앉는 것들은 이제껏과는 다른 것들일 테고, 그 물결이 어떤 무늬를 그려낼지 그 자신도 모른다.
--- p.12
아니, 왜 우세요. 저 그렇게까지 망하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얼마나 열심히 사는데요. 새벽에 일하러 나가서 보면 다 열심히 살아요. 청소 일도 재밌어요. 지금 다른 일도 많이 해요. 김진영 선생님 글이 좋더라고요. 『아침의 피아노』를 정말 잘 읽었거든요. 『상처로 숨쉬는 법』은 어떨까 모르겠네요. 아도르노 강의라. 그냥 읽으면 읽혀지겠지요. 근데 아도르노는 누구래요?
--- p.27
나이 들면 지금보다 할 수 없는 일이, 하고 싶어지지 않은 일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때, 하고 싶을 때 해야지. 커피를 마시는데 책방에 햇살이 들어왔다. 그새 날이 갠 것이다. 늙어가는 일이야 혼자만의 일도 아니고 어쩔 수 없지만, 아직 나는 신간을 읽고 있는 때. 나는 커버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 p.67
삶은 외롭다. 그래서 나는 책방을 구실로 이런저런 일을 도모하는지도 모른다. 책방, 시골책방을 하는 것은 고독하다. 그래서 신발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걷고 종일 책 속으로 파고들기도 한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자연이, 책방이 나를 살리는 중이다.
--- p.83
저 꽃털처럼 가볍게, 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뿌리를 생각했다. 수크령 꽃털은 가볍기 그지없지만, 수크령의 뿌리는 보통 억센 게 아니다. 지난해 덩치 큰 수크령을 옮겨 심으려다 아주 애를 먹었다. 수크령의 일본 이름은 찌까라시바, ‘힘센 풀’이라는 뜻이다. 잎도 날카롭기 그지없다. 억세서 맨손으로 잡으면 손을 베이기 십상이다. 겉보기에는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한없이 무거운 존재. 이 생을 가볍게 농담하듯 넘어가는 이들의 무게를 새삼 느낀다. 꽃털처럼 가벼우려면 얼마나 무거워야 하는가. 일생 동안 다다르지 못하는 세계.
--- p.117
사람이 떠난 공간은 내게 더는 장소로서 의미가 없다. 비록 사람보다 바람이 더 잦은 시골책방이지만 누군가 들꽃 향내를 풍기며 들어설 때 나는 반색한다. 마치 오래 그리워한 이가 온 것처럼. 162~163
오늘 한 젊은 책방주인이 다녀갔다. 그가 말했다.
“사실 그동안 내가 무모하게 책방을 차렸나, 다들 잘하는데 나만 못하고 있나, 뭐 이런저런 생각으로 자괴감도 들고 힘들던 터에 줌에서 만난 책방주인들을 통해 힘을 얻었어요. 고맙습니다.”
순간 울컥했다. 이렇게 하면 돈이 된다, 저렇게 하면 더 좋다. 다른 사람은 말을 쉽게 한다. 그러나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다 똑같아요. 멋대로 하고 싶어서 시작한 책방이니 그냥 멋대로 하세요. 그러다 보면 나만의 길이 보여요.”
말하면서도 길이 보이나,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어쩌겠는가. 길인 줄 알고 가야지. 그러다 보면 진짜 길이 만들어질 테지. 우리가 사는 것처럼.
그래도 책방 하는 일은 꿈을 꾸게 한다. 꿈은 설렘과 떨림을 동반한다. 그래서 무모하게 오늘도 책방 문을 연다. 돈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책방 문을 열면 펼쳐지니까. 이 ‘피로 사회’에서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소, 그게 바로 책방이니까.
--- pp.193~194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걸 구매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작은 책방이 있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책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책은 상품이지만, 그 이상의 가치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다. 나는 책방을 차리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책방을 차리길 백만 번 잘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책방 주인들이 아마 나와 같을 것이다. 이유는 큰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책방 하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은 바로 ‘책’과 ‘사람’에서 나오는데, 그건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아주 은밀한 것이다. 이 즐거움을 책방을 찾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오래 누릴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 pp.228~229
작은 책방이 대단한 장소는 물론 아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장소가 된다. 내가 어느 한 시절들을 보낸 음악다방과 카페와 서점 같은 곳들이 내게 살아갈 힘을 줬던 것처럼. 그러나 세월과 함께 나는 그곳을 잊거나, 잃었다. 나도 변했고, 그곳들 중 대개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 p.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