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백일홍 나무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주코칸이라고 불리는 넓은 강당 뒤쪽의 정원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한 그루 서 있었다.
---「첫 문장」중에서
모든 환자가 죽음과 그 그림자에 떨고 있는 동안, 오직 그만이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듯이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그도 역시 깊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 p.24
소년 시절 꿈꾸었던 ‘산다’라는 것은 지금 같은 이런 비참한 상태를 가리키는 건 아니었다. ‘산다’라는 말 안에는 타오를 듯한, 온몸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기쁨과 슬픔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산다는 것이 그저 하루하루의 소모일 뿐이었다.
--- p.25
산다는 건 자기를 표현하는 거야. 자기를 불태우는 거야. 있는 힘을 다해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아낌없이 태워야 해.
--- p.30
넌 정말로 살려는 마음이 강한 인간이야. 난 그게 존경스러워. 그건 네가 예술가로서의 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야. 예술가는 살아 있어야 해, 일을 하지 않고 죽으면 아무것도 안 되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글을 써내겠다는 네 그 마음, 그게 너라는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거야.
--- p.40
나도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 하지만 젊을 때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잖아. 그리고 난 뭔가를 쓰지 않아도, 뭔가를 보는 것으로써 예술가이고 싶었어. 아니면, 사는 것이 예술이기를 바랐어. 산다는 건, 그 인간이 가진 고유의 표현이니까. 그래서 난 그렇게 살았어.
--- p.40
산다는 건 전혀 다른 거야. 그건 일종의 도취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이성도 감정도 지식도 정열도 전부 다 불타올라 넘쳐흐를 것만 같은 것, 그게 산다는 거야.
--- p.41
나는 과거를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미래를 이제부터 시험해볼 수도 없다. 나는 현재도 미래도 없는 인간이고, 오로지 과거가 있을 뿐이다. 그런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살 수 있을까. 덧없이 지나가는 인생은,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자각하며 붙잡을 수 있을까.
--- p.62
내가 사랑한 사람들은 왜 나를 떠나갔을까, 내 안의 어디가 잘못되었던 것일까. 나는 성실하게 나의 길을 걸었고 결코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았다, 오직 나만이 상처받은 것은 그저 내 영혼이 지나치게 연약하고 가냘팠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었을까?
--- p.63
추억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의 도피, 현재로부터의 탈출일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이 더 이상 새롭게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속박된 일상이 주어진 인간에게, 과거를 되사는 것 외에 달리 어떤 나만의 삶의 방식이 있을까?
--- p.65
신경쇠약이란 건 툭하면 영혼이 놀러 가고 싶어 하는 상태를 말하는 거야. 네 몸은 여기에 있지만 네 영혼은 여기에 없어. 근데 뭐, 그렇게 걱정은 하지 마. 누구나 그럴 때가 있는 법이니까.
--- p.86
하다못해 지금만큼은, 나는 나로서 있고 싶어. 내 꿈을 그리고 싶어.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 말하자면 작위적으로 꾸는 거야. 꿈꾸는 것 말고는 살아가는 법을 몰랐던 옛날과는 다른 거야. 온갖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다만 이런 삶의 방식을 나 스스로 선택한 것뿐이야.
--- p.194
난 그저 편안하게 살고 있는 인간이 쇼팽은 말랑하다는 둥 그렇게 가볍게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도 예술가는 누구나 괴로운 짐을 짊어지고, 언제 쓰러질지도 모른 채 걸어가는 거야.
--- p.199
인간이 날 때부터 지닌 얼음 같은 고독은, 아무리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으로 태워진다 해도 결코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
--- p.207
그녀는 나를 잊었고, 나는 그녀를 잊었다. 인간은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오래된 기쁨과 슬픔은 전부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혀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사람은 새로운 고민, 새로운 괴로움을 위해서는, 모든 걸 잊을 수 있는 걸까.
--- p.246
어쩌면 사랑 역시 인간이 마음속에다 그린 이미지를 자신의 고독으로 색칠하고 자기 멋대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 p.258
미래의 고통을 생각하기보다, 지금, 이 자연, 이 평화를 내 것으로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지에코가 꽃을 따고, 내가 이렇게 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간에, 전쟁이든, 죽음이든, 신이든, 그런 게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지금은 지금처럼 살아 있다. 오로지 이 지금이라는 것 외에 어떤 삶의 방식이 있단 말인가.
--- p.259
이 고독은 무익했다. 그러나 이 고독은 순결했다.
---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