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중용』의 핵심은 ‘군자지도(君子之道)’ 4글자였다. 그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올바르게 사는 도(道)를 부여했으니, 군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는 그 도를 항상 의식하며 성실하게 공부하는 인격자가 되라는 말이다. 이 개념을 열쇠로 삼고서, 난해한 고전으로 알려진 『대학』과 『중용』의 닫힌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대학』과 『중용』은 군자라고 자부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삶의 나침반과 같은 책이다.
--- 「역주자 서문」 중에서
『대학』과 『중용』이 어려운 책이라서 맨 앞에 처음 읽는 독자를 위해 중요 개념을 쉽고 간략하게 해설한 부분을 두었다. 그런 다음에 이 책의 중심인 『대학』과 『중용』 본문이 있는데, 여기에 집중하면서 읽다가 난해한 개념이나 막연한 문장을 만날 때 뒤에 있는 『용학보의』를 사전처럼 참고하면 된다.
--- 「역주자 서문」 중에서
이(理)는 (어떤 목적으로 쓸) 가장 이상적인 설계도에 대한 구상이고, 도(道)는 (그런 집을 짓기 위한) 구체적인 (그러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설계도이고, 그런 설계도 그대로 시공(施工)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인 것이다. 그러니 이(理)와 도(道)는 각각 따로 존재하는 2개의 물건이 아니고 항상 붙어 다니는 것이다.
--- 「대학 중용을 이해하는 기초 개념」 중에서
그렇다면 『중용』에서 왜 귀신을 언급한 것일까? 『중용』은 도의 근원이 하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이 세상 어디에도 도가 없는 데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말이 이어진다. 그런 다음에 바로, 귀신 이야기가 장황하게 나오면서 “귀신이 만물 속에 있다.”고 하는 문장이 나온다. 이렇게 도에 대한 논리가 전개되는 맥락을 보면, 『중용』에서 귀신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고 설정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 어디에도 도가 없는 데가 없다는 것을 귀신이라는 말을 통해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군자는 그런 도를 (귀신을) 엄중하게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 p.19
『대학』과 『중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으로 군자의 도(道)를 설명하는 책이다. 군자가 가야 할 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도(道)는 하늘이 내린 신성한 것이며 이 세상 어느 곳에도 항상 존재하면서 귀신처럼 사람 마음을 들여다보고 사람의 행동을 주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기 몸에도 도가 들어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되고자 한다면 이런 도의 (귀신의) 실존을 의식하면서 생각이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행동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심지어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늘 조심하고 긴장하면서 몸과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대학』과 『중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그 인격의 감화력으로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데, 같은 방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숨길 것이 없는 은밀한 부부 사이가 그 첫 번째 실험장이 된다고 한다. 여기서 잘한 다음에 부모 형제에게 잘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잘하고 나라에서 잘하고 결국 천하에서 잘한다는 논리로 전개된다.
이렇게 도의 실천을 격려하는 『대학』과 『중용』에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종종 인용되는데, 순임금과 문왕, 공자가 그런 인물이다. 이들은 인격 수양이 완벽하여 그 덕이 곧 천지의 덕과 동등하다고 하는 찬양이 『중용』의 끝부분에 이어진다. 비록 그런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해도 사람들에게 군자의 도를 삶의 목표로 설정하고 실천하도록 격려하는 책이 『대학』과 『중용』이다. 천명(天命), 성(性), 성(誠), 경(敬), 귀신(鬼神)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시경』에서 인용된 시(詩)가 나오면 그런 것은 군자의 도를 좀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군자의 도’라는 말을 의식하면서 읽어나가면 처음엔 토막난 듯 분절적으로 여겨졌던 『대학』과 『중용』의 문장들이 하나로 연결된 전체로 보인다.
--- p.23
대학의 도는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선하고) 밝은 덕을 밝히는 데에 있으며, (그런 본성을 스스로 회복하도록) 백성을 나날이 새롭게 하는 데에 있으며, (그런 명덕과 신민의 결과로) 지극한 선에 (이르러) 머무는 데에 있다.
--- p.41
하늘이 명한 것을 (본성으로 내려준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에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따라오는 것을 ‘도(道)’라 하고, (수준에 따라 가르치고 일상적으로 실천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집안 동생 동옥(東玉: 송병순)이 가져다가 번다한 것은 없애고 핵심을 선별하여 또한 채택하고 장구에 따라 보충하고 경전의 뜻을 발명하여 주설(註說)을 논변하니 그 갖춘 바를 다하여 명백하고 조리가 관통함이 엄정하고 간략함을 따랐다. 책을 둘로 나누고 『용학보의(庸學補疑)』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 장씩 책을 넘길 때마다 분명하고 명백하여 마치 수많은 학자들이 함께 한 집에 모여서 간절하게 가르치고 인도하고 면전에서 타이르는 것 같았다.
--- p.206, 「편집자 송병선(편집자 송병순의 형)의 추천서문」 중에서
소주. 요씨가 “행(行)은 사람이 스스로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명(明)은 사람이 스스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운운한 것
율곡이 말했다. “요씨의 설은 문제가 있다. 도가 행해지거나 행해지지 않거나 밝거나 밝지 못하거나는 모두 사람에게 기인하는 것이다.” 퇴계가 말했다. “요씨의 설은 정밀하고 타당하다. 그르다고 할 수 없겠다.”
--- p.265
윤병계가 말했다. “‘도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은 위의 ‘도는 분리될 수 없다.’는 뜻이다.”
--- p.299
김과재가 말했다. “소(素)는 군자가 (지금) 현재에 있는 그 자리를 말한다. 이것을 (과거의) 원래부터[素來]라는 뜻으로 보는 것은 큰 착오다. 소래(素來)라는 것은 본래(本來)라는 말인데, 자리가 어찌 본래 갖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소이적(素夷狄)을 만약에 소래(素來)의 이적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이적에서 출생한 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경문의 본래 취지이겠는가?
--- p.309
김후재가 말했다. “이번 절은 윗글의 성신(誠身)을 이어받아 말하는 것이다. 성(誠)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道)이니 곧 앞에 나왔던 성신(誠身)의 ‘성(誠)’자가 바로 이것이다. 성지(誠之)라는 것은 사람의 도(道)이니 곧 곧 앞에 나왔던 성신(誠身)이 바로 이것이다. 대개 윗글에서 ‘행하는 것은 하나’라는 말을 두 차례 말했고, 또한 성신유도(誠身有道)를 말하면서 아울러 ‘성(誠)’자를 간략하게 말했는데,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 “곧장 ‘성자(誠者)’ 2글자를 설명하여 실리(實理) 자연(自然)은 볼 수 있으나 수양하는 (인위적인) 의도는 볼 수 없으므로 ‘하늘의 도(道)’라고 한 것이다. 아래에서는 ‘성지자(誠之者)’를 설명하는데 그 중간에 ‘지(之)’자 하나를 넣었으니 가히 공부하고 면강(勉强)하고 실행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으므로 사람의 도(道)라고 한 것이다.”
--- p.359
한남당이 말했다. “장구를 참고하면 수장(제1장)은 (『중용』이라는 책) 한 권의 체요(體要)를 말한 것이고 이번(제33)장은 (『중용』이라는 책) 한 권의 요점을 말한 것이니 그 표리(表裏)의 뜻을 더욱 알 수 있다. 대개 수장(제1장)은 하나의 근본에서 분산되어 수만 갈래로 나뉜 바가 되는 것이고 이번 (제33)장은 수만 갈래로 나누어진 것이 합하여 하나의 근본이 되니, (『중용』이라는 책이) 하늘 ‘천(天)’자로 시작해서 하늘 ‘천(天)’자로 끝나니, 단지 의리(義理)의 지극함 뿐 아니라 문장(文章)의 묘미 또한 볼 수 있다.”
--- p.411
이도암이 말했다. “여견기폐간(如見其肺肝)에 대해 율곡은 말하기를, ‘(불선을 하는 자가 그 불선을 가리려고 해도 사람들이 그런 자의 불선을 보기를) 마치 사람들이 자기의 폐간을 보는 것같이[若人之自視肺肝] 할 것’(이니 불선을 숨기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라고 했다. 우계는 이르기를, ‘사람들이 소인을 보는데 단지 그 외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또한 (소인의) 그 내부의 폐간을 본다.’고 했다. (우계는 如見其肺肝의 ‘其자’를 소인으로 본 것이고, 율곡은 보는 사람들 자신의 ‘自’자로 본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것은 지언(知言)하고 궁리(窮理)하는 군자는 소인을 상대할 때 그 사실과 정황을 환하게 보아서 은폐하기 어려운 것이 마치 (소인) 그 사람의 폐간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율곡의 설명은 비록 의미는 있지만 바른 뜻은 아닌 것 같다.”
--- p.505
소주. 운봉호씨가 “신독은 경(敬)을 하여 내 안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혈구는 의(義)를 하여 밖을 방정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
사계가 말했다. “운봉호씨의 설은 억지로 가져다가 붙인 것이다.”
--- p.552
내가 일찍이 (『대학』과 『중용』) 2서를 구해 읽으며 여러 선생의 학설을 참고한 다음에야 비로소 의리의 정미함이 지극히 무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이르러 더욱 천명하게 되었다. 마침내 관련 학설을 모아서 장(章)의 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2권의 책으로 편집하여『용학보의(庸學補疑)』라고 이름 붙였다.
--- p.572, 「편집자 송병순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