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같은 쿠데타였다. 그 소식에 놀란 사람들도 분명히 많았을 것이다. 미얀마에서 민주화가 추진되었던 것이 아닌가? 경제도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지 않았나? 군사정권 등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나라에서 군이 정치로부터 떨어져 있었던 적은 이제까지 한 차례도 없었다. 시대마다 그 범위 및 개입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군은 항상 미얀마의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
--- p.18
쿠데타의 결과, 민주화의 흐름이 역행한 것뿐만이 아니다. 사회의 자유, 경제, 외교 관계 등 모든 방면에서 최근 10년 동안의 발전은 물거품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는 저미하고 국내외에 분쟁으로부터 도망치는 난민이 발생하고 있으며, 인도상의 위기가 우려되고 있다. 그럼에도 군은 쿠데타 당시의 목표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이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동안은 혼란과 정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뿌리가 더욱 깊기에,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불충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정변의 영향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 p.23
NLD는 1988년 이래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에서 주류파를 형성했다. 아웅산수찌의 존재와 1990년 총선거에서의 승리라는 사실이 그 존재감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군사정권과 대립했지만 그 기본자세는 비폭력주의이며, 지향하는 목표가 민주화였다고 하더라도 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웅산수찌가 거듭해서 추구했던 것은 ‘창설자’인 부친 아웅산이 지향했던 군으로 회귀하는 것이었으며, 전면적인 대결은 아니었다. 이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급진적인 혁명을 지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 학생 활동가들이다. 그들/그녀들은 태국 국경 지대로 도망쳐서 1988년 11월에 버마학생민주전선을 결성했다. 카렌민족동맹의 지원을 받아 중국, 인도의 국경에서 전투하는 학생들도 통합하며 군에 대해서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 p.58
미얀마군은 4회의 쿠데타 모두를 군의 수장이 주도해 성공시켜 왔다. 실패한 쿠데타는커녕, 미수에 그친 적도 거의 없었다. 이 점은 빈번하게 쿠데타가 일어나지만 실패도 많은 태국의 경우와는 다르다. 미얀마의 한 가지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쿠데타가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정권의 탈취와 정권의 운영은 다른 것이다. 또한 다른 곤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곤란은 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권의 운영에 있어서의 정당성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국가 전체를 운영하는 것은 군인에게 힘겨운 일이라는 것이다. 각각을 ‘정통성의 곤란’과 ‘통치의 곤란’이라고 일컫도록 하겠다.
--- p.69
테인세인 정권이 발족했을 당초에 기대감은 높지 않았다. 독재가 끝났다고는 하더라도 군사정권 시대의 간부들이 정권에 버티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추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 예상을 초월해 급속하게 개혁이 추진된다. 다만 세계의 민주화 사례를 관찰해 보면 이러한 일은 그다지 드물지 않다. 민중의 혁명으로 일어난 민주화보다도 권위적인 체제가 스스로 자유화 및 민주화를 추진하는 쪽이 수적으로 많다. 이러한 개혁을 이끈 것은 종종 구체제 내에 있었던 개혁파로, 테인세인과 그를 밑받침했던 간부들은 실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 p.99-100
테인세인의 개혁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과제로 자리하던 것이 소수민족 무장 세력과의 화평 교섭이다. 미얀마에는 무장 세력이 크고 작은 것을 합쳐 약 50개 존재한다. 그중에 정부와 적대하고 있는 세력의 다수는 주요 민족인 버마족의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에 저항하며 자민족의 자치권 확대를 요구해 왔다. 근거지는 주로 중국과 태국의 국경 지역이다. 이러한 세력과 군은 독립 이래 전투를 벌여왔으며, 분쟁이 미얀마의 발전을 저해해 왔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테인세인은 화평을 향한 첫걸음으로서 미얀마 전역에서의 정전을 지향한다.
--- p.113
아웅산수찌 정권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애당초 아웅산수찌에 대한 주위의 기대감은 너무나도 높았다. 아웅산수찌의 그녀 자신에 대한 기대감도 대단히 높았을 것이다. 민주화의 유포리아이다. 국제 원조의 세계에서는 그 어떤 국가에서도 정치경제 체제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가깝다는 전제를 ‘이행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미얀마의 개혁에 대한 세계의 반응은 그러한 냉전 이후의 패러다임이 지금도 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만들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약 50년 동안 군사정권이 계속되었던 국가가 그리 간단하게 변할 리는 없다. 변화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느슨하며 진보와 후퇴를 반복한다.
--- p.145
쿠데타 이후, 2월 말부터 본격화된 군의 시민들에 대한 탄압으로 정세는 혼란 속에 빠졌다. 도시 지역에서는 대중교통도 운행하지 않았으며, 일부에서는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로 도로를 봉쇄했다. 하지만 기념식 및 퍼레이드를 중지시킬 기미는 군에게 없었다. 예년에 거행되었던 대로 실시해 쿠데타 이후의 사태에 동요하지 않음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저항 세력에게 이 ‘국군의 날’은 또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파시스트 일본’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던 날이며, 그 ‘파시스트 일본’과 겹쳐지는 것은 군이었다. 통일전선 파사파라에게 겹쳐지는 것은 당연히 자신들이었다. 제2의 독립을 지향한 봉기의 날, 그것이 2021년 3월 27일이 된다. 그러한 목소리가 나왔으며 충돌의 발생이 우려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각지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파악된 것만 해도 전국 73개소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군은 어느 때보다도 병력을 늘리고 강경하게 대처했다. 탄압에 의한 희생자는 173명으로 알려져 있다. 사망자의 다수는 군에 저항한 청년들이었다. 하루 동안 사망자 수로서는 군에 의한 정권 장악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최다이다. 그러한 가운데 군의 퍼레이드를 포함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밤에 개최된 만찬회에는 정장 차림의 민아웅흘라잉의 모습이 보였다. 시민들의 저항에 군이 조기에 굴복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견해는 이날 부서져버렸던 것이다.
--- p.164-165
1988년의 민주화 운동과 그에 대한 탄압을 계기로 군사정권의 대응이 변화한다. 미국은 압력을 중시하는 제재 외교를 전개했다. 미얀마와 관련되어 있는 국익이 많지 않기에 인권 및 민주주의 등의 ‘보편적 가치’에 중점을 두었다. 탄압에 의해 아웅산수찌의 처우가 악화될 때마다 제재의 수준이 높아졌다. 인권과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던 아웅산수찌의 동향이 외교정책을 좌우했다고도 할 수 있다.
--- p.202
2012년에 발단된 불교 신자와 무슬림 간의 종교 대립은 2017년에 라카인주 북부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로 발전했다. 군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토벌 작전을 실시한다. 토벌 작전 중에 잔학한 행위가 각지에서 발생했다. 방글라데시가 인도적 배려에 입각해 국경을 개방했던 적도 있어, 4개월 정도의 사이에 60~70만 명의 난민이 유출된다. 심각한 인도적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미얀마군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강해졌다. 로힝야에 대한 토벌 작전을 제노사이드 및 ‘인도에 관한 죄’라고 보는 지적이 국제사회에서 제기된다. 이에 대해 아웅산수찌는 군의 행동을 옹호했다. 테러 위협에 대처했다는 군의 설명을 그녀도 반복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인권의 상징임이 분명했던 아웅산수찌가 권력자가 되자마자 표변해 군의 무슬림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긍정하는 것처럼 비추어졌을 것이다.
--- p.212-213
미얀마라는 국가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장래를 좌우하는 것은 군, 그리고 그 수장인 민아웅흘라잉이다. 우리가 좋든 싫든 관계없이 실효 지배라는 점에서는 우위에 서 있는 군의 동향이 미얀마의 행방을 좌우한다. 따라서 군의 출구 전략이 어느 정도 실현될 것인가, 그리고 각종 요인으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으로부터 향후의 행방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해질 것이다. … (다음은) 향후의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군과 저항 세력(민주화 세력), 각각이 바라는 결과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작성된 것이다. 즉, ‘군이 바라는 것처럼 저항 세력이 근절된 사회가 되지 않으며’, 한편으로 ‘저항 세력이 바라는 혁명도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기점은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개가 있다. 우선 2023년 8월까지 군이 구상했던 대로 총선거를 마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할 수 있는가 여부이다. 또 하나는 군과 저항 세력 간에 대화가 시작될 것인가 여부이다. 시나리오대로 되는 일은 없겠지만, 장래를 예상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p.237-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