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책(貰冊)’, 이는 오늘날 ‘도서대여’의 옛 이름이다. 18~19세기에 책을 빌려주고 빌려 읽던 유통 방식을 세책이라 일컫는다. 오늘날 도서대여점과 비디오테이프 가게에서 요금을 미리 내고 일정 기간 동안 해당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빌렸다가 되돌려주던 것과 유사하다. 한편, ‘세책 독서’는 세책점 또는 도서대여 기관에서 돈을 내고 직접 책을 골라 빌려 읽는 독서 행위의 전 과정을 의미한다. 세책 독서의 의의는 소수만이 독서를 즐기던 사회 환경에서 벗어나 신분, 계층, 남녀, 직업에 따른 차별이나 제약 없이 독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이런 세책 독서를 가능케 만든 주역 중 하나가 도서대여점, 곧 세책점이다. 세책점은 기본적으로 세책 영업을 통해 상업적 이윤을 추구했다. 상품 가치를 가진 책을 소장하다가 일정 기간 싼값에 빌려주는 영업을 한 것이다. 고객 입장에서는 이런 세책이 자유롭게 책을 즐길 수 있는 소비 활동이자 여가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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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글을 읽을 줄 알았던 여성들은 양반집 부녀자들과 궁녀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채제공에 의하면, 한글을 깨우친 부녀자들이 패설을 경쟁적으로 빌려 읽었다고 했다. 여기서 패설이란 소설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항간에 떠돌던 잡다한 이야기를 패설이라 일컫다가 이내 소설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채제공의 글에 따르면, 이미 18세기 중반에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들이 소설 읽기에 탐닉했으며, 비녀나 팔찌를 파는가 하면 빚을 내고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세책에 흠뻑 빠져 지냈다. 세책의 종수가 천백 가지를 헤아릴 정도였다니 실로 다양한 작품이 세책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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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곳곳에 세책점이 들어서자 여성은 물론 글자를 아는 하인들과 젊은이들까지 책대여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소설책은 나라의 검열이나 관리를 피해 몰래 빌려다 볼 수 있던 대표적인 독서물이었다. 1740년에 영국 최초의 근대소설로 평가받는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가 그렇게 인기를 끈 예다. 도덕주의자들은 이런 세책 독서 풍습을 비판했지만, 소설책은 더욱 자극적이고 조작적이며 선동적이라 할 만한 흥미 본위의 서사물로 등장해 세책점을 매개로 독자와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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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도 세책점은 여성과 하인, 하층계급에게 문학 공급처가 되어주었다. 1750년에서 1800년까지 반세기 동안 독일에서 출판된 소설 5천 편 가운데 4분의 3이 소화될 정도로 세책점은 소설 유통망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독일에서 소책자 소설이 대거 출간되었는데, 이것이 세책점의 인기 대출 상품이었다. 책값도 권당 겨우 1그로센(groschen), 오늘날로 치면 5센트 정도로 저렴해서 글 읽는 하녀도 쉽게 살 수 있었다. 따라서 이를 ‘그로센 소설’이라 불렀다. 그로센 소설은 대도시 하층민과 노동자가 즐겨 읽던 작품으로, 남녀 주인공의 극적인 만남과 이별, 악인의 극악무도한 만행, 부정적 현실 묘사, 이율배반적 윤리 의식을 동원해 읽는 재미를 부추기던 통속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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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소르본대학의 가난한 대학생들은 세책점의 단골이었다. 소르본대학이 있던 카르티에라탱 구역 가게들은 대학생들에게 책을 빌려주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부르주아계급의 고객도 세책점을 단골처럼 드나들었다. 휴가를 떠나는 이들이 시골 별장에서 읽을 많은 양의 책을 한꺼번에 빌려가기도 했다. 글자를 읽을 줄 아는 하인들도, 여성 노동자들도 저급한 문학책을 빌려 읽곤 했다. 이에 반해 상층계급의 고객들이 살던 지역에 위치한 세책점은 살롱(salon) 격을 갖춘 안락한 독서 클럽으로 운영되었다.
--- p.129~131
18세기 중반 미국 사회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목소리가 점차 강하게 분출되었다. 사회적·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고, 당대 사회 이슈를 다룬 신문과 팸플릿을 읽으려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1762년에 미국 동부 지역의 아나폴리스에서 세책점이 처음 나타났다. 아나폴리스의 인쇄업자 요나스 그린의 수습생이었던 윌리엄 린드가 바로 첫번째 세책점 주인이었다. 그는 1758년에 메릴랜드 신문(Maryland Gazette)을 간행할 때 요나스 그린의 파트너로도 참여했다. 언론계와 출판계 경험이 풍부한 린드는 유럽에서 성장해나가던 세책업에 자극을 받아 미 대륙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세책 독서 문화가 이미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기에 그 유행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린드는 세책업이 ‘꽤 새로운 일’이라며 세책 문화 형성에 큰 기대를 가졌다. 아나폴리스의 집에서 세책업을 시작한 린드는 신문에 세책점 운영 규칙을 광고했다. 광고에서 그는 가진 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온 지식을 당대인이 쉽게 접하게끔 세책점 문을 열었다고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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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1년간 연구년을 보낼 기회가 주어지자, 폴란드에서 공부할 때 가졌던 열정과 관심이 되살아났다. 연구 주제를 세계 세책 독서 문화로 잡고, 빈을 거점 삼아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다시 자료를 모았다. 세책점이 존재했다는 도시를 찾아가서 대학 도서관과 고서점을 뒤지고, 세책점 자리였다는 주소지를 찾아가 세책점의 위치와 입지 조건을 일일이 상상하며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무한히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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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독서사에서 세책 문화의 형성과 발달은 소수의 상층 남성만 세책 독서를 문화 활동으로 즐긴 게 아니라 여성과 중하층 일반인까지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수단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하늘에 수많은 별이 수놓아져 있듯이, 세계 세책 독서 문화사를 펼쳤더니 그 안에 수많은 세책 독서 사례가 제각각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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