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전임 교황님의 질병과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있던 기간 중에 교회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났습니다. 교회는 젊으며, 세상의 미래를 품고 있기에 미래를 향한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살아 숨 쉬는 교회를 보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 p.48, 「제1장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중에서
자신의 삶에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시도록 하는 이는 아무것 도 잃지 않습니다.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고, 위대하게 만드는 그 무엇도 잃지 않습니다. 인생의 문은 오직 주님과의 우정 안에서만 활짝 열립니다. 참으로 이 우정 안에서만 인간 존재의 큰 잠재력이 드러나고, 아름다운 존재와 해방시키는 존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 삶의 경험에 근거하여 큰 확신을 가지고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 다.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는 아무것도 빼앗아 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분께 자기 자신을 맡겨 드리는 이는 백배의 상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문을 여 십시오. 그러면 참된 생명을 발견할 것입니다.
--- p.60-61, 「제1장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중에서
동방 박사들은 온 마음을 다해 경배하며 아기 예수님을 임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 세상에 정의와 선을 실현하고자 그분과 함께 봉사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것이 높은 왕좌에서 내려오라는 명령으로는 쉽게 실현될 수는 없다는 것을, 또 자신을 겸손되이 내어 주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이보다 작은 선물은 왕이신 예수님께 충분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힘을 행사하는 신적 방식, 곧 하느님의 존재 방식과 자신들의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로써 진리, 공정, 선함, 용서,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으며, 대신 ‘나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입증해야 하는가?’ 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은 진정한 자신을 찾는 법을 배우고,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진정한 왕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 p.80-81, 「제2장 교회는 살아 있다」 중에서
오늘날 특히 중요한 이성과 신앙 간의 대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바탕으로 할 때 방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대화는 크게 개방된 사고방식을 갖고 발전해 나가야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온 세계가 합당한 이유로 우리에게 기대하는 영의 식별 안에 명확히 발전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시선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만일 올바른 해석 법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읽고 수용한다면, 공의회는 언제나 필요한 교회의 쇄신을 위하여 한층 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 p.109-110, 「제2장 교회는 살아 있다」 중에서
하느님을 순수하고 통찰할 수 없는 주의주의의 영역에 모셔 두면서 우리와 멀어지게 한다고 해서 더 하느님다워지시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참하느님께서는 ‘로고스’로 드러나시고, ‘로고스’로서 행동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충만하시며 행동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이시지요. 물론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사랑은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것’이고, 이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단순한 사고思考 이상을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에페 3,19 참조). 하지만 사랑은 ‘로고스’-하느님의 사랑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예배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영원한 말씀이신 분과 인간의 이성이 조화를 이루는 ‘합당한 예배(ΛΟΓΙΚΗ ΛΑΤΡΕΙΑ)’입니다(로마 12,1 참조).
--- p.109-110, 「제3장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 중에서
그리스도교 선포의 새로운 사실은 그분께서 이제 모든 민족에게 당신을 드러내셨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보여 주시고, 인격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이제 그분께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스도교 선포의 새로운 점은 생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맹목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분께서 바로 로고스Logos이심을 의미합니다. 로고스는 우리의 인간 육신을 취하신 영원한 이성의 존재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Verbum caro factum est.”(요한 1,14) 이러한 사실 안에 이제 로고스Logos가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우리 가운데 존재하십니다. 이 사실은 합리적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이성의 겸손을 필요로 하고, 하느님의 겸손에 응답하는 인간의 겸손이 필요합니다.
--- p.160-161, 「제3장 그리스도교란 무엇인가」 중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비밀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단지 그 비밀의 편린만 볼 뿐입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역사의 심 판관이 되길 원한다면 이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입니다. 그런 행위는 인간을 보호하지 못하고, 단지 인간의 파멸만 가져올 따름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께 끈질기게 외쳐야 합니다. “깨어나소서! 당신의 창조물, 인간을 잊지 마소서!” 하느님을 향한 외침은 동시에 우리 마음을 꿰뚫는 외침이 되어야 하고, 그분의 숨겨진 현존이 우리 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당신 권능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이기심, 두려움, 무관심, 기회주의의 진흙탕으로 뒤덮이거나 질식되지 말아야 합니다.
--- p.188, 「제4장 세상을 향해 응답하다」 중에서
인간은 자신의 입맛대로 조작할 수 없는 ‘자연’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자유 의지로 자신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spirito이고 의지volonta도 가지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자연natura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자연을 존중하고 귀를 기울일 때,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혼자 힘으로 창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수용할 때 올바른 의지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만 인간의 참된 자유가 실현됩니다.
--- p.209, 「제4장 세상을 향해 응답하다」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의 신뢰를 배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친교 안에서 그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키며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충만한 의미를 주십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선하심을 응시하며 마음에 믿음의 불꽃을 간직하십시오.
--- p.238, 「제4장 세상을 향해 응답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