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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고전선

책소개

목차

제1권 (B.C. 58년)
1. 헬베티 족과의 전쟁
2. 게르마니 인과의 전쟁

제2권 (B.C. 57년)
1. 벨가이 인과의 전쟁
2. 해변에 살던 여러 부족의 복속

제3권 (B.C. 57년~56년)
1. 알페스 산지에 살던 여러 부족의 토벌
2. 해변에 살던 여러 부족과의 전쟁
3. 아퀴타니 인과의 전쟁
4. 북쪽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제4권 (B.C. 55년)
1. 게르마니 인과의 전쟁
2. 브리타니 인과의 전쟁
3. 북쪽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제5권 (B.C. 54년)
1. 브리타니 인과의 전쟁
2. 북쪽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모반

제6권 (B.C. 53년)
1. 북쪽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2. 갈리아의 사정
3. 게르마니아의 사정
4. 에부로네스 족의 반란

제7권 (B.C. 52년)
1. 갈리 인 전체와의 전쟁

제8권 (B.C. 51년)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의 서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의 기록

편집자의 말 - 위기를 극복하면 위대해진다
카이사르 연보
카이사르 시대의 로마군대의 모습
로마군단(Rome Legion)의 편성 및 전술
로마군단(Rome Legion)의 전투대형
레누스(라인) 강에 건설된 다리
부족명 색인
인명 색인
지명 색인

저자 소개1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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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ius Julius Caesar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군인·정치가. BC 100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7월을 가리키는 영어의 July는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민중파인 마리우스와 인척 관계로 원로원파인 술라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민중파인 아내와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여러 곳을 떠돌며 숨어 지냈다. BC 78년 술라가 죽은 뒤 로마로 귀환, 정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BC 69년에는 재무관, BC 65년 안찰관(按察官)을 거쳐 BC 63년 종교상 최고직인 종신 대신관이 되었다. BC 60년에는 폼페이우스 및 크라수스와 동맹을 맺고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하였다. BC 58년∼BC 50년, 속주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군인·정치가. BC 100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7월을 가리키는 영어의 July는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민중파인 마리우스와 인척 관계로 원로원파인 술라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민중파인 아내와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여러 곳을 떠돌며 숨어 지냈다. BC 78년 술라가 죽은 뒤 로마로 귀환, 정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BC 69년에는 재무관, BC 65년 안찰관(按察官)을 거쳐 BC 63년 종교상 최고직인 종신 대신관이 되었다. BC 60년에는 폼페이우스 및 크라수스와 동맹을 맺고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하였다. BC 58년∼BC 50년, 속주 갈리아의 장관으로서 갈리아 전쟁을 수행, 브리튼과 게르만 족의 영지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대부분 평정하였다.

BC 53년 삼두체제의 한 중심인 크라수스가 동방원정에서 전사함으로써 원로원 보수파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으며 BC 51년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로마 소환과 군대해산을 결의하자, BC 49년 1월에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함으로써 내전을 시작하였다. BC 45년 3월에는 폼페이우스의 아들까지 진압함으로써 마침내 5년간의 내전을 종결시켰다. BC 46년에 10년 임기의 독재관이 되었고, 곧이어 BC 44년에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율리우스력을 제정하고 노예에게 관직을 허용함으로써 로마 시민권을 대폭 확대하는 한편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여 로마를 정비하는 등 개혁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지나친 권력의 집중을 견제하고자 했던 원로원 공화파와 공화정 지지자들에 의해 BC 44년 원로원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다른 상품

역자 : 박광순
1955년 충북 청주 출생.
청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 역사교육학과 졸업.
범우사, 기린원 등에서 편집국장 및 편집주간 역임.
현재 저술 및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

역서로 『갈리아 전기』, 『카이사르 내란기』. 『타키투스의 연대기』, 『헤로도토스 역사』,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서구의 몰락』, 『역사의 연구』, 『트로이의 부활』, 『세계를 바꾼 어느 물고기의 역사』, 『콜럼버스 항해록』, 『아틀란티스의 유산』, 『사막의 반란』 등이 있음.

품목정보

발행일
2006년 02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30쪽 | 635g | 153*224*30mm
ISBN13
9788908010260

책 속으로

다음날, 군대에 곡식을 나누어 주어야 할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오고 하이두이 족의 지역 중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인 비브락테 까지는 18마일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곡물을 공급하기로 마음먹고, 헬베티 족으로 부터 길을 바꿔 비브락테를 향해 급히 떠났다. 이 일이 갈리 인의 기병대장 아이밀리우스 의 탈주병을 통해 적에게 통지되었다. 헬베티 족은 로마 군이 두려운 나머지 아군에게서 멀어져 갔다.

--- p.41

출판사 리뷰

*지중해의 패권자 로마를 덮친 최악의 위기, 갈리 인의 대이동.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였다!


기원전 58년, 카르타고와 그리스 그리고 중동의 여러 나라들을 굴복시켜 지중해의 패권자가 된 로마의 북쪽지방에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바로 오늘날 스위스 일대에서 살고 있던 갈리 인의 일족인 헬베티 인들이 자신들이 편히 살 수 있을 곳을 찾기 위한 대이동을 개시한 것. 물론 이들의 이동 경로에는 오늘날의 이탈리아 반도 북부인 ‘갈리아 프로빈키아’가 있었다.

건국 초기부터 수시로 갈리 인들의 침략을 받아온 로마에 또 다시 갈리 인에 의한, 그것도 미증유의 위기가 닥쳐오자 갈리아 프로빈키아의 담당관인 카이사르는 진퇴양란에 빠지는데……. 이들의 대이동을 막지 못하면 작게는 그가 담당한 지역의 백성들이 죽고, 크게는 조국의 수도가 위험에 노출될 상황. 하지만 카이사르에게는 이는 곧 그의 명성을 당대에 길이 떨칠 기회이기도 했다.

*죽기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꾸짖고 격려하며 출전,
승리와 명예를 동시에 취하다!


군복을 입은 자도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카이사르의 병사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헬베티 족 전체 그리고 뒤이어 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던 게르마니 인들의 군대와 연이은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무적의 로마 병사들 또한 선배들의 명성만을 이어받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함을 드러냈던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죽기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꾸짖은 다음, 그가 갈리아 프로빈키아의 담당관으로 배치 받았을 때부터 함께 했던 제10군단의 병사들을 친위대 삼아 진군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자극받은 다른 군단의 병사들 또한 카이사르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결국 카이사르는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기를 결심한 병사들을 이끌고 훨씬 더 많은 적을 궤멸시켰다. 그리고 이로서 양이요 토끼였던 카이사르 휘하의 병사들이 사자요 호랑이가 되면서, 카이사르는 전 갈리아의 제패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갈리아 전기」라는 형태로 정리?기록하고 출간한 카이사르는 그의 조국 로마의 안보를 수호하고 이익을 가져온 영웅이 되었다.

*갈리아 전기의 클라이맥스, 알레시아 공방전!
그날 카이사르는 세계적 위인이 되었다!


물론 자신의 민족이 타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음을 달가워하는 이 또한 없음은 동서고금이 다름이 없으니, 이에 갈리 인들 중에도 - 카이사르마저 그의 맞수로서 인정한 - 베르킹게토릭스라는 영웅이 등장하게 되는데……. 기원전 52년, 로마로부터의 민족해방을 부르짖으며 갈리 인 전체가 하나가 되어 카이사르와 로마군을 갈리아에서 몰아낼 것을 부르짖는 베르킹게토릭스의 휘하에서 이미 카이사르에게 굴복했던 갈리아의 모든 부족이 항쟁을 결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카이사르는 신속히 군대를 움직여 갈리아의 요충지 아바리쿰(現 프랑스의 부르주)을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시켜 이곳에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은 뒤, 뒤이어 알레시아에 집결하여 카이사르의 군대를 단 한 번의 전투로 궤멸시키려는 베르킹게토릭스와의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게 된다. 베르킹게토릭스가 갈리 인 여러 부족들에게 전령을 보내어 남은 병사들을 모두 알레시아로 데려올 것을 요청한 사이, 카이사르는 포위망과 방어선을 겸하는 이중 고리모양의 거대한 원형 진지를 건설하여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이어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 똑같이 식량과 보급품 결핍이라는 상황에 놓였음에도, 카이사르와 그의 병사들은 끝까지 버티어 냈다. 하지만, 베르킹게토릭스의 군대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결국 베르킹게토릭스는 ‘총사령관인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백마를 타고 카이사르의 진영으로 가 항복을 선언한다. 이로서 카이사르는 오늘날의 서유럽 역사의 막을 연 인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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