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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B.C. 58년)
1. 헬베티 족과의 전쟁 2. 게르마니 인과의 전쟁 제2권 (B.C. 57년) 1. 벨가이 인과의 전쟁 2. 해변에 살던 여러 부족의 복속 제3권 (B.C. 57년~56년) 1. 알페스 산지에 살던 여러 부족의 토벌 2. 해변에 살던 여러 부족과의 전쟁 3. 아퀴타니 인과의 전쟁 4. 북쪽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제4권 (B.C. 55년) 1. 게르마니 인과의 전쟁 2. 브리타니 인과의 전쟁 3. 북쪽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제5권 (B.C. 54년) 1. 브리타니 인과의 전쟁 2. 북쪽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모반 제6권 (B.C. 53년) 1. 북쪽에 위치한 여러 부족의 토벌 2. 갈리아의 사정 3. 게르마니아의 사정 4. 에부로네스 족의 반란 제7권 (B.C. 52년) 1. 갈리 인 전체와의 전쟁 제8권 (B.C. 51년)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의 서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의 기록 편집자의 말 - 위기를 극복하면 위대해진다 카이사르 연보 카이사르 시대의 로마군대의 모습 로마군단(Rome Legion)의 편성 및 전술 로마군단(Rome Legion)의 전투대형 레누스(라인) 강에 건설된 다리 부족명 색인 인명 색인 지명 색인 |
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관심작가 알림신청Gaius Julius Caesar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다른 상품
다음날, 군대에 곡식을 나누어 주어야 할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오고 하이두이 족의 지역 중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인 비브락테 까지는 18마일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곡물을 공급하기로 마음먹고, 헬베티 족으로 부터 길을 바꿔 비브락테를 향해 급히 떠났다. 이 일이 갈리 인의 기병대장 아이밀리우스 의 탈주병을 통해 적에게 통지되었다. 헬베티 족은 로마 군이 두려운 나머지 아군에게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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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패권자 로마를 덮친 최악의 위기, 갈리 인의 대이동.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였다! 기원전 58년, 카르타고와 그리스 그리고 중동의 여러 나라들을 굴복시켜 지중해의 패권자가 된 로마의 북쪽지방에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했다. 바로 오늘날 스위스 일대에서 살고 있던 갈리 인의 일족인 헬베티 인들이 자신들이 편히 살 수 있을 곳을 찾기 위한 대이동을 개시한 것. 물론 이들의 이동 경로에는 오늘날의 이탈리아 반도 북부인 ‘갈리아 프로빈키아’가 있었다. 건국 초기부터 수시로 갈리 인들의 침략을 받아온 로마에 또 다시 갈리 인에 의한, 그것도 미증유의 위기가 닥쳐오자 갈리아 프로빈키아의 담당관인 카이사르는 진퇴양란에 빠지는데……. 이들의 대이동을 막지 못하면 작게는 그가 담당한 지역의 백성들이 죽고, 크게는 조국의 수도가 위험에 노출될 상황. 하지만 카이사르에게는 이는 곧 그의 명성을 당대에 길이 떨칠 기회이기도 했다. *죽기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꾸짖고 격려하며 출전, 승리와 명예를 동시에 취하다! 군복을 입은 자도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카이사르의 병사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헬베티 족 전체 그리고 뒤이어 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던 게르마니 인들의 군대와 연이은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무적의 로마 병사들 또한 선배들의 명성만을 이어받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함을 드러냈던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죽기를 두려워하는 병사들을 꾸짖은 다음, 그가 갈리아 프로빈키아의 담당관으로 배치 받았을 때부터 함께 했던 제10군단의 병사들을 친위대 삼아 진군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자극받은 다른 군단의 병사들 또한 카이사르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결국 카이사르는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기를 결심한 병사들을 이끌고 훨씬 더 많은 적을 궤멸시켰다. 그리고 이로서 양이요 토끼였던 카이사르 휘하의 병사들이 사자요 호랑이가 되면서, 카이사르는 전 갈리아의 제패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갈리아 전기」라는 형태로 정리?기록하고 출간한 카이사르는 그의 조국 로마의 안보를 수호하고 이익을 가져온 영웅이 되었다. *갈리아 전기의 클라이맥스, 알레시아 공방전! 그날 카이사르는 세계적 위인이 되었다! 물론 자신의 민족이 타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음을 달가워하는 이 또한 없음은 동서고금이 다름이 없으니, 이에 갈리 인들 중에도 - 카이사르마저 그의 맞수로서 인정한 - 베르킹게토릭스라는 영웅이 등장하게 되는데……. 기원전 52년, 로마로부터의 민족해방을 부르짖으며 갈리 인 전체가 하나가 되어 카이사르와 로마군을 갈리아에서 몰아낼 것을 부르짖는 베르킹게토릭스의 휘하에서 이미 카이사르에게 굴복했던 갈리아의 모든 부족이 항쟁을 결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카이사르는 신속히 군대를 움직여 갈리아의 요충지 아바리쿰(現 프랑스의 부르주)을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시켜 이곳에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은 뒤, 뒤이어 알레시아에 집결하여 카이사르의 군대를 단 한 번의 전투로 궤멸시키려는 베르킹게토릭스와의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게 된다. 베르킹게토릭스가 갈리 인 여러 부족들에게 전령을 보내어 남은 병사들을 모두 알레시아로 데려올 것을 요청한 사이, 카이사르는 포위망과 방어선을 겸하는 이중 고리모양의 거대한 원형 진지를 건설하여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이어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 똑같이 식량과 보급품 결핍이라는 상황에 놓였음에도, 카이사르와 그의 병사들은 끝까지 버티어 냈다. 하지만, 베르킹게토릭스의 군대는 붕괴되기 시작했고 결국 베르킹게토릭스는 ‘총사령관인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백마를 타고 카이사르의 진영으로 가 항복을 선언한다. 이로서 카이사르는 오늘날의 서유럽 역사의 막을 연 인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