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이 보는 그림책은 창에 비유할 수 있다. 세상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유아들은 그림책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 그림책의 그림은 실물이 아니라 이차원적인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런데 부모가 그것의 이름을 부르고 유아가 그 언어와 이미지의 대응 관계를 알아차리게 되면서 세상은 그들의 마음속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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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은 그냥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다. 그림책은 엄청나게 다양한 역할을 한다. 아기의 장난감이 되기도 하며, 아름다운 언어와 이미지를 들려주고 보여주기도 하고,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기도 하고, 지식을 전달하기도 한다. 인간이 아니라 의인화된 캐릭터가 등장하는 모든 그림책은 인간에 관해, 세상에 관해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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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의 세계관 읽기’는 직관적이거나 감각적 읽기가 주지 못하는 많은 유익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우리의 삶에 은밀히 스며들어 우리의 생각과 생활 방식의 일부가 된 세계관을 확인하게 해 준다.
그 세계관은 우리의 문화 속에 숨어 있는 까닭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놀랍게도 그림책은 어떤 매체보다도 그러한 세계관을 전파하는 매우 호소력 있는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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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림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보편 진리를 간명하게 전달하는 힘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윌리엄 스타이그는 단연 독보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시사 만화가의 경력을 쌓고 있던 그는 이순의 나이에 그림책 창작에 입문하였다. 풍부한 삶의 경험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가족애, 사랑, 우정, 용서, 성실, 인내, 의로움, 충성됨과 같은 덕목과 함께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 존재론적 주제까지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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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리 시점을 통해 독자는 주인공이 점점 더 책에 몰입해 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서두에서는 형이 왼팔로 동생의 어깨를 감싼 자세로 나란히 앉아 책을 보다가, 몇 장면 지나지 않아 동생은 형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몸을 구부려 책을 보고 있다. 마치 둘이 혼연일체가 되어 책 속에 빠져드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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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사용하고 있는 액자식 프레임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효과를 낳는 시각적 장치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의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처음 몇 화면의 그림은 프레임에 갇히고 글과 분리되어 있으나 낙원 섬으로 떠나는 장면부터 그곳을 탈출하는 장면까지의 그림 프레임은 화면 전체에 펼쳐져 있다.
--- p.95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로 상처를 준 후 후회하고 반성하지만 얼마 안 되어 그 결심은 잊혀지고 똑같은 실수를 거듭한다. 그렇게 우리는 실수하고, 사과하고,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살아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식구들은 스핑키를 훨씬 더 세심
하게 배려해 주었어요. 그게 그리 오래 못 가는 게 탈이지만.”이라는 결론에 공감하며 미소짓게 된다.
--- p.122-123
이들의 견해는 백일몽의 가치와 긍정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는 동시에 부정적인 측면도 지적하고 있다. 즉, 공상은 기분을 전환하고, 감정의 질서를 회복하고, 인지적 피로를 해소하고,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공상이 이런 긍정적인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목표와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p.180-181
어린이 독자를 위한 그림책 평론이라면 그 텍스트를 추천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라도 어린이에게 적합한 텍스트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신의 기준과 그에 따른 판단이 있어야 한다. 그림책 비평에서 이러한 기준과 근거들은 당연히 평론가의 세계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교육관이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 p.203
지금까지의 논의로 인해 그림책 비평에서 세계관의 탐구가 가장 우선되는 작업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계관적 접근을 할 때 내용이 비평의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비평에는 당연히 예술적 기교와 인간 경험과의 연관성 측면도 다루어져야 한다. 어린이가 주인공인 경우, 그 텍스트가 어린이의 경험을 문자적, 시각적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p.207
하나의 해석만이 옳다는 주장은 대화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며, 반대로 독자의 해석을 저자나 텍스트 자체보다 우위에 두는 것은 독자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인식론적 한계로 인해 우리의 앎은 언제나 제약을 받지만, 항상 더 좋은 해석은 가능하다.
--- 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