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우선적으로 다루는 근본적인 질문이 역사적인 것이라면(“바울이 의미한 바는 무엇이었는가”), 그다음으로 다루는 질문은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으로 빚어감”이라는 과제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다(“바울의 말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갈라디아서와 같은 책을 백지 상태의 “중립적인” 마음으로 읽는 독자는 거의 없다. 나 역시도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 본문이 나를 비롯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난 적이 없다.
--- p.17, 「머리말」 중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빚어감”의 의미를 공동체와 그 안에 있는 개개인을 빚어가되, 메시아 예수의 영이 그들 가운데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그들 안에 개인적으로 거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하고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빚어가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교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개인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라는 견해는 물론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를 뛰어넘어 “빚어감”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면, 믿음과 세례 안에 씨앗처럼 뿌려진 그리스도인의 특질을 묘목을 기르듯 양육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가면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열매”를 맺으려면 말이다.
--- p.23, 「서론」 중에서
결국 이 말은, 바울 서신에서 가장 중요한 단락이자 논쟁을 일으킨 본문인 2:15-21을 제대로 온전히 이해하려면 바울이 1:18-2:10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내용에 촉각을 기울여야 하며, 이 본문과 2:15-21을 이어 주는 2:11-14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바울이 큰 걱정과 불안 가운데 절박한 심정으로 긴급하게 글을 써 내려가면서, 말하려는 바도 없는데 스무 절가량을 두서없이 회상에 허비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이 모두가 전하려는 요지의 일부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바울이 말하려는 그 요지 자체를 오해할 수 있다.
--- p.148, 「갈라디아서 1:18-2:10」 중에서
늘 그렇듯, 신학적 혼란의 해결책은 역사에 바탕을 둔 주해이다. 본문에 뛰어들기 전에 중요한 요소 세 가지를 언급하겠다. 첫째, 갈라디아서라는 편지 자체의 더 큰 맥락, 둘째, 1세기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이라는 맥락, 셋째, 그리스-로마 사고방식 안에서 바울의 핵심용어들 이해하기다. 갈라디아서의 전통적 해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 세 가지가 생경한 이국땅에 발을 디디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울이 실제 의도한 바대로 본문을 읽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 p.201, 「갈라디아서 2:11-21」 중에서
열심을 가진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것, 곧 아브라함의 “씨”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결과이자, 하나님이 궁극적 자비를 보이시는 이유다. 다소의 사울은 이러한 견해를 열정적으로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물로 왔음을 믿게 되었다. “공격”을 받을 위협은 여전히 상존하나, 하나님의 자비로움이 끝내 이길 것이다.
--- p.284-285, 「갈라디아서 3:1-14」 중에서
전에는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장면 앞에서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빛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장관을 뒤로한 채 어두컴컴한 집으로 들어가 잠이나 자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가 오셨고, 메시아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노예 생활과 죽음이라는 막다른 길을 극복하셨으므로, 토라로 돌아가는 것은 새롭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이는 것, 곧 메시아와 함께 죽고 살아나서 새로운 현실로, 새 창조의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 공동체에는 민족을 구분짓는 경계 표시가 더 이상 의미 없다.
--- p.360, 「갈라디아서 3:15-29」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