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깊이 있게 성찰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각했다. 우주는 특수한 에너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개별적이며 우연한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이런 생각을 품으면서 나는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늙어서도 여행하며 살았으니 얼마나 현명했던가! 가능한 끝까지 굳지 않으려고 했다. 가능한 한 프로테우스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 변화무쌍한 기질처럼 생각이 유연해야 철학을 공부할 자격이 있다. 결국, 나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 p.19, 「1부 열대 지방으로 ― 떠나기 전에」 중에서
아프리카의 자연은 우리에게 예술 작품처럼 커다란 감흥을 준다. 자연만큼 훌륭하게 작업할 수 있는 조각가가 어디 있을까. 자연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인간 형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어렵다. 대부분 한참 멀다. 순수하게 예술적인 면에서나 작품이 암시하는 힘에서나 그 모델에도 크게 못 미친다. 유럽의 탐미주의자들은 최고의 예술만 중시한다. 나도 그렇다고 해야 할까? 예술가들은 영원하다고 하지만 우연히 작품을 내놓을 기회와 명성을 누릴 뿐이다. 조각가들은 인류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때부터 수많은 세월 동안 몸짓만으로 모든 표현을 할 수 없어 그것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 그 작품은 참신한 폭로가 된다.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 느끼는 것이 별로 없다. 시인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려면 낯선 감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 p.31, 「1부 열대 지방 ― 아덴」 중에서
해박하고 추론에 뛰어난 학자들은 불교 철학을 흐뭇해한다. 이해할만하다. 마흐는 형이상학이 필요한지 몰랐고 종교적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현상학적 상대주의에 만족했다. 이와 반대로 개념들을 붓다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보편성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절대의 철학을 지향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절대 존재를 염두에 둔다. 본질 개념에서 붓다와 우연히 비슷한 눈으로 현상을 보는 힌두교 현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서구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중시하는 일종의 종파를 창립한 오귀스트 콩트, 인격에 담긴 신성으로서 ‘사람으로 살아 있는 신’을 생각했던 윌리엄 제임스, 만년에 ‘불가지론’으로 기운 허버트 스펜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붓다는 현상학이라고 할 만한 종교를 일으켰다. 붓다는 복음서의 형식으로 인식을 분석했다. 마흐가 했을 법한 일이다. 붓다는 그런 것을 했다. 서구인이 보기에 매우 역설적인 일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브라만 철학자들은 불교를 무시했다. 처음에는 나도 이상하게 보았지만 이제는 비로소 이해한다. 열대 지방에 사는 사람과 관련된 생리 조건에서 불교는 사실 복음서의 의미를 띨 만하다.
--- p.54, 「2부 실론 ― 칸디」 중에서
바라나시는 누구든 접근할 수 있다. 바라나시는 모든 종교 사상을 갠지스강으로 모으는 거대한 구심점이다. 신성한 힘을 주는 강이다. 보면 볼수록 존재를 실감하게 되는 그 영기(靈氣)는 대체 무엇일까? 알 수없다. ‘에테르’의 진동 같은 것일까. 물론, 의사가 지어주는 약은 아니다. 아무튼, 구체성을 띠고 떨며 피어오른다. 분명, ‘사상’도 몸이 있다. 물건처럼 ‘객체’다. 구체적이기만 할까? 생각보다 오래갈지 모른다. ‘시대정신’도 바람 못지않게 객관적이다. 만약, 사상에 구체성이 없다면 감염력도 없지 않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영기를 직접 파악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이렇게 강한 영향을 받을까? 이곳 주민이나 체류자는 익숙해서 그러겠지만, 이곳을 느끼지 못할 만큼 우둔한 사람이나 영기가 어디 있다며 의심하지 않을까. 고대 인도에서 전해지는 유혹의 이론을 글로 남긴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어둠에 싸인 타트바 이론이다.
--- p.277, 「3부 인도 ― 바라나시」 중에서
중국 사람들은 자기네 제도보다 위에 있다. 공자의 교훈 덕분이다. 유교 원리는 이렇듯 단순해 보인다. “실천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라는 원리라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유럽에서, 도덕의 광신자들 가운데 모범을 보인 사람을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를 가까이서 찾을 수 있다. 유럽 사람들은 도덕원리를 항상 바깥에서 받는다. 하느님이든 권위자든 자연에 반하는 실천이든 밖에서 주어진다. 그러나 유교에서 도덕원리는 부자지간처럼 자연스럽다. 남녀와 ‘친구의 친구’처럼 군주는 백성과 서로 믿고 선의를 보인다. 사람이 본성을 가꾸는 동안 도덕은 자연스레 우러난다. 따라서 유교는 인간성의 완전한 발전을 강조한다. 그런데 누구든 이런 명령을 내심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누구나 교양 있는 사람이 되려 한다. (…) 중국 사람들이 우리만큼 도덕을 생각하기란 어림없는 일이다. 그들에게 서양의 덕망 있는 지도자들만큼 높은 이상형은 없다(개신교도만큼 도 없다). 그렇지만 중국 사람들은 실제로 더욱 도덕적이다.
--- p.450, 「5부 중국 ― 칭다오」 중에서
다시 한 번, 나라의 걸작들 앞에서 중세 가톨릭 정신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얼마나 대단한 종합인가. 인도의 지혜, 그리스의 형식, 기독교의 교리가 하나가 되다니! 호류지에 있는 ‘한국 불상’이 영광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 독특한 형태는 나일강에서 인더스강에 걸친 곳에서도 절대로 포착하지 못했던 큰 뜻을 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조금도 절충하지 않았다. 경이로운 사랑의 충동이다. 서양에서 기독교 금욕주의로 또 청빈을 자랑하는 것으로 변형되었고, 율법밖에 모르던 유대 정신 속에서 숭고한 은총의 종교를 낳은 충동이다. 원시 불교에서 수행자는 이런 충동으로 자족하며 살았다. 지상의 어떤 인연으로도 구원받지 못하고 떠도는 혼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지장보살의 이미지는 정말로 이론상 결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녹여냈다.
--- p.575, 「6부 일본 ― 나라」 중에서
나는 기적을 좋아한다. 또 그래야 한다. 꽤나 정확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칸트를 좋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가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이 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들처럼, 나도 인간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가 어떤 것인지 그려볼 수 없다. 예컨대, 객관적으로 공간의 거리가 없다는 주장처럼, 또 다른 세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매번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진심으로 이 세상의 시작은 신화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신화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직하다. 그 자체는 그럼직하다.
--- p.668, 「7부 신세계를 향하여 ― 킬라우에아 용암 지대에서」 중에서
우리가 자유를 얻자면 자연을 이겨내야 한다. 사실 자연을 극복한 곳에서는 자유의 가능성이 저절로 찾아왔다. 뉴욕이 증명하는 사실이다. 미국 생활은 어디에서나 자연을 이기고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미국에서 인도의 이상을 정반대 방법으로 실현했다. 이곳 생활은 유럽에 비해 단순해 보인다. 유럽보다 널리 보급된 편리한 점(편의 시설)은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잉여분도 가능한 한 없앴다. 필요한 것은 매우 인색하다. 예컨대, 식당에서 서비스도 거의 없다.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애당초 대다수 사람이 인건비를 줄이고 욕심에 걸맞게 더욱 큰 이윤을 남기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단순한 식사는 그럴 필요가 없을 때조차 그렇게 한다. 사람들 대부분이 거기에 익숙해져 버렸고 사치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이 더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예 노동에 기초한 경제와 같은 결과를 완벽하게 낳은 조직화다. 차이가 없지 않다. 노예 노동제에서 주인은 부덕하고, 현대 생활은 단순히 합리적 욕구를 채워준다.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무관한 채 금욕 수행자만큼이나 초연해하면서! 사실상, 이런 모습이다. 유일한 서구식 생활법이다. 이런 해법이 상책일까? 한번 다르게 생각해 보자. 서구식 인간 존엄성을 개인에 무심한 인도와 러시아와 비교해보자.
--- p.768, 「8부 미국 ― 뉴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