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는 내가 가진 우울이 병이라고 했다. 나는, 난 그냥 내가 남보다 쓸데없이 감상적이고 나약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병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병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이란 뜻이었다. 느닷없는 날씨의 변화와도 같다. 오래된 노래 가사에도 있지 않은가. 쏟아지는 비까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Prologue」중에서
요즘도 자주 그때의 꿈을 꾼다. 열두 살 때 처음으로, 정신병동의 옥상에 서서 아홉 층 밑의 아스팔트를 내려다보던 그때. 어쩌면 나는 그때 죽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한다. 그때 한 걸음만 더 내디뎠다면, 이 열병 같은 삶을 앓는 대신 바람의 일부가 되었을 텐데. 그럼에도 나는 삶을 선택했다. 죽음이 두려워 끝끝내 삶을 받아들였다.
---「본 투 비 블루」중에서
나는 가능한 나의 우울장애를, 정신질환자로서의 병력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려 한다. 이를테면 지난주에 비염이 심해져서 이비인후과에 갔다 왔다거나, 어깻죽지가 쑤셔서 침을 좀 맞고 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내게는 도움이 됐다. 이렇게 말할 때면 우울이라는 것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번거로움이며 평범한 시련처럼 느껴진다.
---「때때로 느껴지는 안경처럼」중에서
나는, 내 마음이 내 맘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해내고도 남았어야 할 일들이 풀리지 않을 때, 금방 나아질 줄 알았던 것들이 오랫동안 차도가 없어 보일 때, 사소한 일들에 지나치리만큼 흥분하거나 무기력해질 때, 지나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들에 잔뜩 긴장하게 될 때, 나는 나약하고 위태롭게 태어난 스스로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토록 하찮은 존재인 나 자신 앞에서, 나는 더욱 더 작은 존재가 된다.
---「불가능한 마음의 작도」중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것을 정답 삼을수록, 내 인생 전반을 차지하는 일상은 하잘것없는 오답이 되어간다. 여행을 하면서 자유롭고 행복한 나와, 집으로 돌아와 별다른 것 없는 일상을 사는 우울한 나. 그 두 가지 인생 사이에 선을 그어놓고, 간혹 무리해 많은 돈을 써가며 그 선을 넘어갔다가 금세 돌아온다. 짧디짧은 행복을 위한 긴 불행.
---「무작정 떠날수록 우울해지는 이유」중에서
지난 2018년 10월, 나는 술김에 집에 있던 수면제 한 통을 다 집어삼켜 자살을 시도했다. 결과적으로는 살아남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걱정을 끼쳤다. 다만, 나는 내가 죽고 싶었던 마음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할 수 없었다. 그 무렵의 나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고, 하루하루 숨 붙이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 더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이나,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과 결정을 하게 된 것이나. 그게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고 느꼈다.
---「죽고 싶은 마음을 위한 변호」중에서
나는 이분법적 사고를 싫어하지만, 누구보다 이분법적인 인간이기도 하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혼자 썩고 문드러지는 게 편하다. … 혼자 우울해하는 것과 달리, 타인의 우울을 이해하는 데는 부단한 노력과 배려가 불가피하다. 전염되지 않고 병자를 도우려면 얼굴을 가려야 하는데, 우울은 얼굴을 가린 상대방과 함께 있을 바에야 혼자되는 것이 낫다고 느낀다.
---「우울한 사람과 같은 곳에 있는 방법」중에서
사람들은 줄곧 욕망이 인생을 망쳐버린다고 믿는 것 같지만, 실은 욕망이야말로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핵심이었다. 우울장애가 심각한 단계에 이르자 나는 아무것도 욕망할 수 없었다. 그저 나라는 존재가 증발해 사라지는 상상을 하루에도 열두 번, 어느 날 뉴스에 ‘20대 무직 청년, 반지하 원룸에서 숨진 채로 발견…… 경찰은 극단적 선택 추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뜨고, 거기 내 이름이 박 아무개로 등장하는 이미지를 스물여섯 번씩 떠올렸을 뿐이다.
---「더하기보다 빼기」중에서
나는 내가 우울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울한 인간이라고 해서 꼭 우울하기만 한 인생을 살라는 법은 없다. 그야 그럴 확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높긴 하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가장 우울한 인생이란, 우울한 사람이 전혀 우울하지 않은 체하며 사는 인생이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어서 매일 웃고 떠들다가, 끝내는 나 자신에게마저 소외되는 인생이다.
---「우울하다는 선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