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이 연금으로 기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마디로, 퇴직연금이 준공적연금화되어야 한다. 퇴직금의 퇴직연금 전환을 의무화하고, 일시금 수령을 대폭 제한할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2020년 적용대상 근로자(1년 이상 재직자) 중 퇴직연금 가입자는 52.4%에 불과하다(나머지는 퇴직금 대상자). 1년 이상 재직 근로자 대부분이 이미 국민연금에 가입되어 있는 것과 대비되는 수치다. 퇴직연금이 의무화되면, 가입 근로자가 국민연금 수준으로 2배 늘면서 사각지대가 대폭 축소된다.
--- p.188, 「6장 〈노후대비, 국민연금으로 충분할까: 퇴직연금〉」 중에서
〈표 7-1〉은 시간제, 파견제, 기간제 등의 비정규직이 1년 후 그리고 3년 후 정규직으로 이동할 확률을 보여준다. 많은 나라에서 비정규직의 40% 정도가 1년쯤 후에는 정규직으로, 3년이 지나면 60% 정도가 정규직으로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3년이 경과해도 22.4%만 정규직이 된다. 한 번 비정규직이면 영원한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종사상 지위뿐만 아니라 사업체 규모별 이동성의 단절도 확인된다. 〈그림 7-2〉는 중소규모 사업체 종사자가 3년 후 어디에서 일하고 있는가를 나타낸다. 중소규모에서 대규모 사업체로 이동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나마 2009년 4.3%를 정점으로 2%대로 내려앉았다. 국민들은 안다. 첫 직장의 중요성을. 두 번째 기회란 없다는 것을. 첫 관문은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다. 다음은 대기업 공채에, 공무원시험에, 공기업시험에 붙기 위해 젊음을 탕진하는 것이다.
--- p.220, 「7장 〈국가는 왜 노동시장에 개입할까: ‘상품’이 된 노동력과 노동시장정책〉」 중에서
국제 비교를 해보아도, 한국의 가족정책 지출은 매우 낮다. 한국은 2018년 현재 가족정책에 대한 공공사회지출이 GDP 대비 1.2%로, 스웨덴 3.39%, 프랑스 2.85%, 영국 3.23% 등에 비해 1/3 정도 수준이다. OECD 평균 2.12%에 비해서도 1/2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는 저출산 대책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본 적이 전혀 없다.
한국은 그간 저출산 대책으로 공보육에만 의존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0세아와 1세아 영아의 취원율은 OECD 국가 중 최고이고, 3세아 취원율도 94.1%로 공보육이 발달한 북유럽 수준이다. 그런데 앞서 스웨덴이나 독일의 예에서 보듯, 사회정책 차원에서 출산율을 끌어올리려면 공보육만으로는 안 된다. 공보육과 소득보장의 쌍두마차를 가동해야 한다.
--- p.256~257, 「8장 〈출산 파업을 막을 수 있을까: 돌봄 노동의 사회화〉」 중에서
고용보험이나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한 프레카리아트를 위해 5,000만 명 전체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할 이유는 없다. 자원이 무한정이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고, 한국은행에서 윤전기 돌려 돈을 찍어내도 인플레이션 없이 경제가 잘 돌아간다면 기본소득을 나눠 줘도 좋겠다. 하지만 우리네 살림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재원은 제한되어 있다. 위험 불문하고 기본소득에 막대한 국가재정이 투입되면, 진짜 필요한 곳에 돈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진정 프레카리아트를 위해서라면 기본소득제도를 운용할 돈으로 실업부조와 기초연금을 기초생계보장선까지 충분히 올려주는 게 합리적이다.
--- p.287~288, 「9장 〈미래 사회보장의 대안?: 기본소득〉」 중에서
진보진영은 복지증세가 필요함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 직접세 위주로, 대기업 과세와 부자증세 차원에서 접근한다. 사회복지세 같은 새로운 세목의 신설도 주장한다. 복지의 맛을 알아야 세금도 낼 거라며, 먼저 부채를 통해서라도 복지를 확대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와 정치 현실을 무시한 채 조세정의나 이념을 앞세워 증세를 이루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복지국가의 물적 토대인 경제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제·정치적 조건은 증세에 매우 불리한 구조다. 조세정의만 앞세우다가는 경제가 어려워지고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아 더 이상 복지를 확충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조세정의를 앞세우기보다는 실질적인 증세에 목적을 두고, 경제를 살피며 조세저항을 우회할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p.327~328, 「10장 〈복지에 필요한 돈은 어디서?: 복지증세〉」 중에서
복지국가를 로빈 후드 모형과 돼지저금통 모형으로 나누기도 한다. 로빈 후드 모형은 의적 로빈 후드가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눠주듯이, 고소득층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저소득층에게 복지를 나눠주자는 것이다. 돼지저금통 모형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나누기보다는, 사회적 위험이 있는 곳에 함께 모은 저금통을 열어 지원을 해주자는 것이다. 필자는 돼지저금통 모형에 입각해 한국 복지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안했다. 돼지도 크게 키우기를 바란다. 그래야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튼튼한 한국경제, 묵직한 돼지저금통을 기대한다.
--- p.361, 「11장 〈복지국가 대한민국으로: 미래 설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