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이었나, 자다가 갑자기 눈이 떠졌어요. 아마 화장실에 가려고 그랬을 거예요. 어두컴컴한 방을 손으로 더듬어가면서 나갔어요. 어차피 그렇게 넓은 집도 아니어서 굳이 불을 켤 필요는 없었거든요. 그렇게 거실을 지나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찹, 찹, 찹, 하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뭐랄까.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한 아이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듯한 소리랄까.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싶어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봤어요. 그러자 또다시 찹, 찹, 찹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바깥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예전 제 방에서 나는 소리 같았어요. 혹시 언니가 내는 소리인가 했는데 문틈 새로 보이는 방은 어둠 그 자체였어요. 온 집 안이 깜깜했죠.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계속 찹, 찹, 찹,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진짜 너무 무서워서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지 못하겠더라고요. 그치만 도저히 확인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언니가 걱정되기도 하고, 혹시 내가 꾼 악몽이랑 관련된 일인가 싶기도 해서요. 겨우겨우 용기를 내서 방문을 살짝 열어봤어요. 그때 목격한 광경이 저는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요. 제가 문틈으로 뭘 봤는지 아세요? 바로 물구나무를 서서 기괴하게 걸어가고 있는 언니의 모습이었어요.
---「당신과 가까운 곳에」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사건은 일어났다. 중간고사를 막 끝마친 날이었다. 그간 나름 공부하는 척을 하느라 며칠이나 아지트를 방문하지 못했던 나는 어서 빨리 답장을 확인하기 위해 아지트로 달려갔다.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이상하게 마음이 들떠있던 날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젖은 담배꽁초가 눈에 들어왔다. 절반쯤 피우다 만 것으로, 종이가 전부 찢어져 안에 있던 재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 지저분한 광경이 어찌나 반갑던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재빨리 문을 잠갔다. 지하철 노선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글씨 속에서 열심히 녀석의 낙서를 찾았다. 그리고 타일의 끄트머리에 가서야 그동안 못 보던 낙서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와줘.
전에 나누었던 대화들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이, 검고 딱딱한 글씨는 그렇게만 적혀 있었다. 느닷없이 대체 뭘 도와달라는 걸까. 나는 바로 답장을 남겼다.
무슨 일 있습니까?
보통은 다음 날이 돼서야 낙서를 확인하지만 그날만은 예외였다. 모두 하교하고 없는 시간을 틈타 나는 다시 한번 아지트를 찾았다. 어딘가 예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한 대로 그사이 답장이 와 있었다. 하지만 거기 적혀 있던 내용은 내 예상을 완전히 웃도는 말이었다.
사람을 죽였어. 이제 시체 처리는 어떻게 하지?
---「시체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중에서
동료들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집에 오게 됐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내게 어젯밤 일을 물어봤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황망한 기분으로 바닥에 들러붙은 혈흔을 내려다봤다. 결국 나는 그 피가 누구 것인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됐다. 눈을 떠보면 주인 모를 구두를 신고 있거나 폐타이어를 끌어안고 있었다. 지폐가 두둑이 들어 있는 장지갑이 호주머니에서 나온 적도 있었다. 지갑 안에는 신원을 알 수 있을 만한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기억이 없으니 돌려줄 방법도 없었다.
하루는 뭔가 울어대는 소리에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웬 덩치 큰 개가 침대 밑에 앉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짖어댔다. 내가 사는 연립주택은 반려동물을 들이는 걸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어지간히 당황했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시 범죄를 저지르는 건 아닐까. 내 상황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뉴스에서 음주와 관련된 사건들이 나올 때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음주운전 사망사고, 음주폭행 사건, 살인사건, 심신미약 감형 논란 등등. 나는 뉴스와 일절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니었다. 뉴스를 보는 내내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기억에는 없지만 내가 저질렀을지 모를 사건들이 보도되는 것 같았다. 최근 가까운 야산에서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 그 사건과 무관한 걸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과거로부터의 해방」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