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세계관들이 구체화될 때, 즉 실제 생활 방식에서 그것들이 구현된 것을 볼 때다. 세계관은 신학이나 철학 같은 사고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관은 인식의 틀이며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인지하는가, 혹은 사람들이 얼마나 잘 인지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면 된다. 어떤 것에 부딪히거나 걸려 넘어진다는 것은 그 대상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눈이 그것을 인지할 뿐 아니라 깊이 들여다볼 수도 있다.
--- 「1장 세계관과 문화」 중에서
제임스 사이어는 세계관을 가리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주’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다른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듯한, 혹은 어떤 사람이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는다. 사실 그럴 때가 많다.…바로 이런 이유로 서로 다른 인생관을 가진 이들이 서로 대화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실제로 그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으며, 상대방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 사실은 백인이 원주민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실패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아이들은 다른 ‘대화의 세계’ 속에 살기에 교수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 「2장 세계관 분석하기」 중에서
우리는 자연을 숭배하는 모든 범신론적 관념을 거부하지만, 땅을 정복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포함된 자애로운 보호와 보존이라는 매우 중대한 요소 또한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동산을 경작하며 또한 보존해야 한다. 우리의 문화 형성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되고 창조세계에 대한 참된 돌봄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우리는 이 땅의 주인인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는 야웨의 궁극적 주권에 대한 순종적 응답으로서 우리의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부름받았다. 땅을 정복하는 것은 언약적 책임의 문제인 것이다.
--- 「3장 창조에 기초하기」 중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마치 반죽 속에 넣은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지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셨다(마 13:33; 눅 13:20-21). 하지만 이 비유의 요점은 하나님 나라가 서서히 성장해서 마침내 모든 것을 채울 것이라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후천년주의자가 아니셨다. 예수님은 세상이 점점 나아지리라고 믿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투쟁이고 전투임을 인정하셨다. 하지만 이 비유는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준다. 죄의 누룩이 모든 창조세계 속에 철저히 퍼져 있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 나라의 누룩도 ‘저주가 발견되는 곳이면 어디든’ 퍼져 나갈 것이다. 또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 당신의 가공할 개입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충만하게 임할 것이다.…이런 우주적 구속의 와중에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우리는 어떻게 어울리고 있는가? 구속받은 인간인 우리는 누구인가? 또한 우리의 구속적 사명은 무엇인가?
--- 「5장 구속으로 변화되다」 중에서
이원론은 소위 영적 생활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영적 생활을 기도, 성경공부, 교제, 전도와 관계된 것으로 간주한다.…이원론은 구조와 방향을 혼동한다. 방향 문제가 삶 전체를 망라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원론은 방향을 구조의 특정 부분과 동일시한다.…이원론은 우리를 세상 도피적 의식으로 이끈다. 이원론은 우리에게 오고 있는 천국에 대한 성경 이미지를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성경의 미래관은 창조세계의 회복이자 주님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우리 삶의 회복이지만 이원론적 종말론은 우리를 창조세계로부터 데려다가 하늘에 둔다. 세계관은 사물을 보는 우리의 방식에 영향을 끼치며, 성경을 읽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성경적 세계관의 포괄성이 결여된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오해하게 만든다.
--- 「6장 이원론 문제」 중에서
이는 서구 세계관이 갑자기 무신론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철저한 무신론자들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세속주의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신앙 결핍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버나드 질스트라가 지적했듯이, 세속주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부정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속적 세계관에서 신 존재가 반드시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세계가 어떠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이 말해야 할 메시지를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듯 세속주의는, 세속(saeculum)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와 관계성에 회의적이다. ‘세속주의’의 어원인 이 라틴어는 직역하면 ‘시대’라는 뜻으로 특히 시간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이해된 창조세계를 가리킨다. 또한 이 단어는 역사 영역, 즉 모든 일의 시간적 영역에서 하나님을 점점 배제시킨다. 세속이 점점 절대화됨에 따라 현대 세계관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지위가 현저하게 점점 축소되었고, 그것에 비례해서 인간의 지위는 점점 확대되었다.
--- 「7장 이원론의 발전 과정」 중에서
서구를 지배하는 세계관은 하나님 혹은 신들의 권위를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규범을 정하는 인간 자율성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런 인본주의적·세속적 본질에도 불구하고 서구 문화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다.…세속 신전의 꼭대기에는 불경건한 삼위일체, 세 인격 안의 한 신, 세 절대자 안의 한 우상이 서 있다. 세 절대자란 바로 과학주의, 기술주의, 경제주의다.…오늘날에는 이윤의 극대화와 경제성장이 최고의 자리에서 호령하고 있다. 월터 윙크는 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의 경제 체제는 전적으로 세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제사장이라는 종교적 가면을 쓰고 있다.” 경제 체제가 제사장인 이유는 점증하는 물질 번영과 안녕이라는 좋은 삶의 세속적 구원의 중보자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향하여 있는 부와 경제적 안정이 흐르는 언약의 땅이라는 현대판 유토피아다.
--- 「9장 우리 시대의 신들」 중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예배다. 철저한 공동체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데, 이 공동체가 주류 문화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배 때문이다. 공동체의 예배는 공동체 전체의 생활 패턴을 형성한다.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공동의 정신 곧 세계관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는 공동체의 것으로 말이다. 결국 공동체의 예배는 그저 종교의식 정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이것이 롬 12:1-2의 요점이다). 바로 여기에 몰락해 가는 사회 속 기독교의 문화적 증거의 본질이 있다.
--- 「10장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대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