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다루는 각 쟁점은 모두 도전이나 토론, 논쟁이 벌어지는 접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역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문들을 알지 못하고서는 어떤 교리도 성공적으로 설교하거나 가르칠 수 없다. 성결에 관한 문헌을 보면 과거에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성결의 진리를 강하게 옹호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오류는 세대를 이어 가며 주기적으로 재발해 일종의 영속적 특성을 지니지만, 그렇더라도 한 세대의 중심 교리를 오늘의 특정 문제와 연결 지어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 「서문」 중에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때문에 그가 본성과 행동에서 실제로 얼마나 죄가 많은지와 관계없이 신분상으로는 성결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바울이 참된 그리스도인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중요한 표현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그가 가능하게 하신 구원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를, 하나님께서 자기 스스로를 속여 신자의 마음이 죄로 가득하더라도 마치 성결한 것처럼 여겨 주시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성자의 거룩함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성결하셨고, 만약 그리스도인이 성결하다면 그는 신성한 성품에 실제로 참여하는 자가 되었기에 거룩한 것이다. ... 성경에는 온전히 성화된 사람의 마음에 이루어지는 실제적 성결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제시하는 말씀이 적지 않다.
--- 「1장 “성결과 죄의 근절"」 중에서
성결의 체험은 세례로 묘사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2 세례라는 용어는 언제나 특정한 시점에 이루어지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지, 결코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되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는 않는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 물 세례든 성령 세례든 세례를 점진적으로 받는다는 생각은 매우 터무니없는 것이다.
성결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나 죽음으로도 묘사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성결의 체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선물’로 묘사된다. ‘성령의 선물’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자주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은 “이는 …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한다. 선물이 어떤 특정 순간에 그것을 받을 사람의 손에 전해진다는 사실은 명백하지 않은가? 선물을 점진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단지 용어만 혼란시킬 뿐이다.
--- 「2장 “점진적 성화와 순간적 성결"」 중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는 그리스도로 인해 자신이 실제로 범하던 죄에서 벗어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용서받아야 할 죄를 지었고, 씻음 받아야 할 불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용서받고 씻음 받은 사람이라도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
요한 자신은 신약성경에서 이런 주장을 가장 분명하게 반대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신자가 죄 짓는 것을 허가해 준 사람으로 그렇게 자주 인용되어 왔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 힘들 정도다. 요한은 요한1서에서 우리가 이미 인용한 강력한 구절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1:6).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2:4).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2:9).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3:15).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5:18).
--- 「3장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죄의 올바른 정의"」 중에서
성령의 증거는 감정이나 흥분, 기쁨의 황홀경을 동반할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을 성령의 증거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성령의 증거는 성령께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는 주권적 영광으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심을 믿는 내적 확신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5:26; 16:13-14)라고 말씀하셨다.
존 웨슬리가 오래전에 가르친 것같이, 이 성령의 증거와 반드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성령의 열매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는 아름다운 아홉 가지 은혜(갈 5:22-23)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성령 충만한 사람의 인격에 이미 나타난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 없는 성령의 증거 또는 성령의 증거 없는 성령의 열매를 온전한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어우러져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 강한 확신을 주는데, 이 확신은 어떤 외적이고 물리적인 징표나 심리적인 징표보다 뛰어나다.
밝은 대낮에 촛불을 들고 나가 해가 떴는지 살펴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마음이 성결하게 된 사람은 더는 자기 마음에 죄라는 불치병을 고치는 ‘의의 태양’이 떠올랐는지 알아보기 위해 잘못되기 쉬운 어떤 징표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 속에 충만히 임재하셨음을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 「4장 “성결과 그 징표"」 중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사람이 자신의 신체에 위해를 가해 자살할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잃어버릴 두려움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자살의 공포에서 건져내기 위해 ‘너는 자살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라고 설득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확신을 잃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죄로 인해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 이 책 3장에서 보았듯, 하나님께서는 그런 정죄를 해결하는 순간적이고 완전한 치료책을 주셨다. 다시 타락하게 될 것을 두려워함으로 낙심에 빠지는 모든 사람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조건적 구원 보장이라는 거짓된 교리를 추종한 나머지 율법무용론적 경솔함의 늪에 빠지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안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현재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곧 구원하시는 은혜와 성결하게 하시는 은혜, 그리고 보존하시는 은혜다. 이것이 인간의 억측이 뒤섞이지 않은 참된 구원 보장의 교리다. 이것이 죄 짓는 것을 방조하지 않는, 영혼의 참된 안전이다.
--- 「5장 “성결과 영원한 구원 보장"」 중에서
· 현재형은 어떤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하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며 습관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나는 기록하고 있다”(I am writing)와 같은 것이다.
· 미완료형은 동일하게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행위가 과거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는 기록하고 있었다”(I was writing)와 같은 것이다.
· 아오리스트(부정과거, 앞으로는 모두 아오리스트로 표기함 - 역주) 직설법은, 굿윈(Goodwin)이 설명한 대로, “단순히 과거에 어떤 행위가 순간적으로 발생했음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나는 기록했다”(I wrote)와 같은 것이다.
· 완료형은 현재는 이미 끝난 행동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기록하는 일을 끝낸 상태다”(my writing is just now finished), 즉 “나는 기록을 마쳤다”(I have written)와 같은 것이다. 또 완료형은 그 결과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기록되었으되”(It is written)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 끝났고, 현재도 기록으로 남아 있음을 뜻한다. 완료형으로 문이 닫혔다는 것은 지금도 닫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 과거완료형은 과거의 어떤 행동보다 먼저 일어난 행동을 가리킨다.
--- 「 “부록: 성결과 헬라어 시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