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잃는 건 잊는 것보다 슬픈 일이다. 그게 시간이 나에게 가르쳐준 사실이다. 잃어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가져온 건 지금 나에게 손을 뻗는 아빠, 라는 이름뿐이다. 그가 나를 만진다. 이마에 닿는 그의 손이 축축하다. 축축하고 떨리는 그 손이 홀씨가 붙어 있는 내 눈썹과 볼을 지나 더러운 머리카락과 목과 어깨와 팔과 손을 만진다. 내 몸에서 바람이 분다. 바람이 새로 태어난다. 나는 가볍게 몸을 떤다. 몸을 떨며 그가 내 팔목을 잡고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헤아리는 걸 본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의 손가락을 세듯, 확인한 것을 다짐받겠다는 듯, 세다가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세는 그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기뻐서, 혹은 믿을 수 없어서. 기쁘고 슬퍼서 아프다. 이제야 기쁘다고, 슬프다고, 아프다고 말할 수 있다. 돌아왔으니까.
그의 곁으로, 우리 집으로, 나는 돌아왔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다시 부르고 또 부른다. 나는 웃는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이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을 부른다. (p.11)
헤어졌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민지 궁금하지만, 더 물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없던 엄마를 떠올리는 것보다는 있다가 없어진 엄마를 떠올리는 쪽이, 훨씬 더 슬플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영복이의 드러난 발목과 맨 발등의 자잘한 상처들을 바라본다. 그 상처들에도 각각 하나씩 슬픈 기억이 있을 거 같다. 나는 그때 어디에도, 아무거나 편하게 묻고 대답을 구할 수 있는 사이는 없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어떤 말은 그냥 스스로의 마음에 묻고, 가슴에 간직해야 하는 거다. (p.77-78)
밤은, 언제나 거기 있다고 생각했던 사물들을 조금씩 옮겨놓는다. 아무도 모르게 사물들은 조금씩 움직이며 자라고 늙는다. 그 사물들 속에서 아빠는, 자면서 운다. 그 이유를 몰라 나도 밤마다 운다. 우리를 둘러싼 벽이, 문이, 신발장에 걸린 구둣주걱이, 천장의 얼룩이 조금씩 늙어가며 같이 운다. (p.84)
누군가는 중독의 처음이 호기심이라고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중독의 또 다른 처음은 슬픔이다. 슬픔은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중독은 한여름에 타들어가는 잎사귀의 잎맥처럼 모든 것이 말라버리기를, 그래서 아무것도 남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의 방편이다. 오랫동안 몰랐지만 나도 그랬다. 배는 곯지 않았지만, 배가 고프지 않으니 기다렸다는 듯 슬픔이 밀려왔다. 잃어버린 것조차 잊어버릴까 봐 슬퍼서 울던 시절은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나날이 시작됐다. (p.132)
그동안 골목마다 다른 세기의 바람이 불었다. 어제까지 있던 가게가 하룻밤 만에 없어지고, 불과 이십 초 만에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하루아침에 다리가 붕괴되는 것을 보았다. 사라지는 건 언제나 찰나였다. 사라지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너무 오래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뛰기 시작했다. 언제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라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다리가 꼬여 땅바닥에 뒹굴 때까지, 무작정 뛰었다. 그사이에 알게 된 게 있다면 삶은 절대로 단 한 발자국도 건너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견디듯 걷거나 달려야 했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p.135-136)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아이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온갖 소리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들썩이는 저녁에 나는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그 사소한 목소리에 오래 귀 기울였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를 부르는 그 짧고 간단한 소리가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소리인 거 같았다. 텔레비전을 아무리 오래 틀어놔도, 아무리 오래 허공을 응시하고 있어도, 한자리에서 꼼짝 않고 밤낮이 바뀌는 것을 지켜봐도,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을 가진 나 또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본 지 오래된 사람이었다. 미르가 죽고 나서, 광식이를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호명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없다는 건, 그런 것이다. 불러줄 사람도 없고 부를 사람도 없다는 것. 물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고, 살 수 있고, 살아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느냐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늘 그런 질문을 받을까 봐 두려웠다. 평생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살아 있는 게 부끄러웠다. 휘적휘적 걷던 나는 걸음을 멈췄다. 도대체 나란 인간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p.140-141)
나는 귀밑까지 붉어진 영복이를 보며, 다시 내가 아는 영복이를 생각한다. 비록 내가 아는 영복이가 영복이의 전부는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영복이가 가짜인 것도 아니다. 걱정도 많고, 수줍음도 많은 열 살짜리 어린애.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가 비밀이 되는 걸 아는, 설명할 수 없어 비밀을 만드는 늙은 어린애. (p.238)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야 내 이름이 진심으로 좋아진다. 사랑해, 라고 말하면 사랑해, 라고 대답하는 이 세상의 대화법을 잊지 않을 거다. 비밀처럼, 때때로 지나가는 바람처럼, 바람이 남긴 흔적처럼 누군가의 귓가에 속삭일 것이다. 사랑해, 라고. 그게 이 세상의 햇볕이, 바람이, 날리는 꽃잎이 우리에게 전하는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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