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고향 그리고 어린 시절

고향이란 그리움의 장소이다. 떠나 있으나 항상 가슴 속에 살아있고, 혼자 있으나 함께 있는 환상의 마을이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에게도 이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I. 그의 부모

가가와 도요히코의 고향 도쿠시마현 이타노군 호리에무라 히가시 우마츠 메(德島縣 板野郡 堀江村 東馬詰)는 아산산맥의 남쪽에 펼쳐진 요시노강의 충적평야 한 가운데 있다. 오늘날은 오오아시쵸 히가시 우마츠메라고 불리 는 지역이다. 시고쿠의 사부로 요시노강은 도쿠시마 평야를 가로지르는 큰 하천인데, 예로부터 범람이 되풀이되는 곳이다. 중류와 하류에는 비옥한 농 토가 있는 길이가 약 25km인 하천이다.
도요히코가 살았던 곳은 요시노강 지류의 북쪽이었다. 히가시 우마츠메 일대는 요시노강 하구와 가까운 곳으로 낮은 습지가 많아서 수리 시설에 유 리하고, 기후도 온화하여 옛날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메이지 중엽까지는

쌀과 보리, 염색업도 번성하여 에도시대부터 부유한 농가가 많았다. 특히 히 가시 우마츠메에는 마미야(間宮), 반도우(板東), 가가와(賀川)의 세 가문이 이 지방의 부자였는데, 마미야는 돈 부자, 반도우는 땅 부자, 가가와는 딸부 자로 알려졌다.

I. 아버지 가가와 준이치(賀川純一)와 이소베(磯部) 가문

도요히코의 아버지 준이치(賀川純一)는 1849년 3월 17일 히타노군(板野郡) 다이코우무라(大幸村)에서 출생하였다. 이 지방에서 대대로 술장사를 하는 이소베 가문의 당주인 유우 고로우(柳五郞)의 3남이었다. 고로우에게 는 7남 1녀가 있었는데 가업은 장남이 이어가고 동생들은 각각 다른 가정에 양자가 되거나 출가하였다. 3남인 준이치도 15세 때 가가와 가문의 데릴사 위가 되었다.
이소베 가문은 그 지방의 명망가였다. 가업을 이어 받은 장남 타메기치(爲吉)는 호탕하며 남의 일을 잘 돌보아 주는 성격으로 1873년 미요시군(三好郡) 야마시로타니(山城谷)에서 징병령에 반대하는 소동을 진압시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리고 도쿠시마현이 고치현에 합병되었던 1879년에 고 치현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의장이 사퇴한 후 부의장에서 의장에 취임 하였다. 그는 고치현에서 도쿠시마현을 분리시키는 운동을 전개하고 이를 성사시켜 도쿠시마현 의회 의장으로 활약하였다. 아우인 준이치도 형 못지 않은 열혈한으로서 가가와 집안의 데릴사위가 된 후 가업은 돌보지 않고 공 부나 정치 운동에 열중하였다.
준이치는 자유민권운동이 성행할 당시 정치 결사인 지죠사(自助社) 유력 한 멤버로 활약하다가 뜻을 품고 아내 미찌를 데리고 상경하였다. 그는 뛰어 난 재능을 인정받아 원로원 곤쇼(權少) 서기관이라는 중앙의 관리로 임명되 었다.
그러나 1875년 지죠사가 발행한 추유쇼(通諭書)라는 국회 개설을 약속하는 조칙의 주석서 내용이 문제가 되어 담당자로서 책임지고 사퇴하여 도쿠 시마로 돌아갔다. 귀향 후에도 능력이 인정되어 도쿠시마현이 확정되기 전의 묘우도우현(名東縣) 다카마츠 지청장과 고치현 도쿠시마 지청장 등의 요직 을 거쳤다. 이는 현재의 시장이나 지사에 해당하는 요직이었다.
얼마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요꼬하마에서 이식(利殖－일종의 금융업) 사 업에 종사하였으나 고베에 생활의 터전을 정하고 운송업인 가가와 회조점 (해운업자와 하송인 사이에 화물 운송에 관한 일을 하는 가게)을 경영하였는 데 당시 튀르키예(터키)의 목조순양함 엘도구를호의 유품 인양에 주력하여 튀르키예(터키) 제국에서 훈장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준이치는 사업이 궤도에 오르게 된 1892년 44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다. 그 때 도 요히코의 나이는 4세였다.

2. 가가와 도요히코의 친어머니 가메

준이치가 데릴사위가 된 가가와 집안도 대지주였다. 양부 모리헤에의 아 버지인 가가와 소자에몬은 히타노군 내의 쇼우야(莊屋)에 20년 이상 근무하 여 19개 마을 소우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또 나가하라우라(長原浦)의 측량 이나 한도가와(板東川)의 치수 등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소자에몬의 뒤를 이은 모리헤에는 2명의 딸이 있었다.
동생 히사는 근처의 마미야 집안에 출가하여 1남 4녀를 두었고, 언니 미찌 는 데릴사위로 들인 준이치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생후 1년 안에 병사하였다. 도요히코와 그의 형제자매는 모두 미찌가 낳은 자식이 아 니었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생모는 가메라는 여성이었다. 가메에 대해서는 자세 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마스에라는 이름으로 연회석상에 나온 그녀를 준이 치가 사랑하여 함께 동거하게 되었다. 가메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하며 남겨진 편지들을 보면 상냥한 성품과 높은 지성미를 갖추었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의 격동 중에 몰락한 어느 사족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나는 친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가가와 도요히코가 후일에 한탄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시 가가와 회조점과 거래한 도쿠시마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가메 여사는 어린 것을 업고 상냥하게 손님을 접대하며 피로한 그들 을 위로하였다. 저녁이 되면 부뚜막에서 불을 피워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서 분주하게 일하였다. 틈틈이 가게에서 일하는 어린이의 글씨 공 부를 지도하였다. 이 모습에 감동한 주민들이 마을의 자랑으로 삼았다” (요코야마 하루이치(橫山春一)「가가와 도요히코 연구자료」).

이 이야기에서 가게 일이나 가족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그의 어머니 모습이 돋보인다. A. C. 쿠누텐의 박사 논문인“해방의 예언자－일본 사회사 에서 본 가가와 도요히코 연구”에 의하면 가메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가와 도요히코 집안은 명문가였으나 그의 생모는 그런 계급 출신 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흐트러짐이 없고 재 능 있는 여자였다고 한다. 그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기생이 되었 다.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과 학대받고 괴롭힘을 당해서 육체가 건강하 지 못한 점이 자식에게 전해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도요히코 의 어머니가 그에게 준 것은 예술적 재능과 육체의 허약함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견딜 수 있는 용기도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도요히코 의 파란만장한 72년의 생애를 보면 탁월한 두뇌와 행동력을 함께 지닌 아버지의 피와 병약한 몸을 극복하며 평생 타인을 위해 봉사한 상냥한 어머니 피의 소산이라고 생각된다.”

II. 고독한 어린 시절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수채화 같은 추억의 시기이다. 가가와 도요히코 는 슬픈 출생의 자취를 안고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의 70평생의 모체가 되었으니 이것을 조명해 보는 것은 매우 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고베에서의 유년 시절

가가와 도요히코는 1888년 7월 10일 고베에서 준이치와 가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도요히코라는 이름은 아버지 고향에 있는 오오아사히고 신사(大麻古神社)의 제신(祭神)이었던 도요우케 히메노미고토(豊受럓尊)와 사루타 히코노미고토(猿田彦尊)에서한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가가와 회조점은 글공부를 좋아한 준이치가 젊은 시절 공부한 한코우 쵸 우쿄우칸(瀋校長久館)의 친구 곤도 렌페이(近藤平썾)의 후원 아래 비교적 번창하였다. 곤도는 실업계에서 활약하였는데 후일 일본 우편선 사장이 된 실력가였다.
도요히코는 4세까지 고베에서 자랐는데 그 시기에 대한 자료는 없다. 그 자신이“나는 어머니에 대해 알지 못한다.”라고한 것도 당연한것 같다. 후 일 그는 도쿠시마 시절 형 탄이치(端一)가 경영하는 고베의 가가와 회조점에 다녀온 인상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여름 방학이 되면 형은 나를 고베까지 데리고 갔다. 그 곳은 시골과는 전혀 다른 곳이어서 깜짝 놀랄 뿐 아니라 큰 기선도 보았다. 서양인 선 장도 보았고 기차도 처음 타 보았다. 환등기라는 것을 처음 보았으나 가장 즐거웠던 것은 와다미사키(和田岬)에 있는 박물관이나 수족관에 가는 것이었다. 일본 우편선의 큰 배에 짐을 실을 때 문지기를 도와서 하물 수량이 틀리지 않도록 헤아려 주기도 했다. 당시 고베에는 전기 시설이 없었고 석유등의 호야 청소도 하였는데 석유등도 신기하였다. 아와(阿波)의 농촌에서는 유채씨 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의 출세작이 된『사선을 넘어서』의 도입부에 있는 고베에 대한 묘사는 사물에 대한 그의 강렬한 인상에 기초한 것이라 짐작된다. 추측이지만 유년 기를 보낸 고베의 정경을 상상케 하는 것으로 아마미야 에이이치(兩宮榮一) 는「히가시 고마가타교회 월보」제 56호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