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여행은 성경이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우리를 위해 기록하신 것이라는 대전제 아래 진행된다. 우리는 성경을 존귀히 여기며 거룩한 말씀으로 다룬다.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특정 본문이 담고 있는 구체적인 사안들은 성경의 원래 독자가 처한 특정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반면, 그 본문 속에 있는 신학적 원리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 원리는 고대 성경 독자와 오늘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의미를 지니며 모두에게 적용된다. 신학적 원리가 제공하는 이 원리화의 다리(principlizing bridge)를 놓는 일이 해석 여행에 속한 중요 단계 중 하나가 될 것이다.
--- 「해석 여행」중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파악하는 첫 단계에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당신은 의미를 발견하고 적용하는 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첫 다섯 장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주의 깊게 읽는 단계를 지나친 채 피상적으로 읽은 후 곧바로 적용으로 나아간다면, 본문의 의미를 놓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성경은 따분해질 것이다. 본문 속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어떤 새로운 것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고 지속적으로 관찰한다면, 확신하건데 당신은 본문의 참된 의미에 도달하게 될 확률이 대단히 높으며, 성경은 당신에게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 될 것이다. 본문에서 지금까지는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담화」중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즉 특정한 지역에 살며 특정한 언어를 말하고 특정한 삶의 방식을 채택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고대의 역사-문화적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살았던 사람들’을 무시한 채 곧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으로 건너뛸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식(해석상의 접근 방식)은 하나님이 의사소통하기로 선택하신 방식을 반드시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래 독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으셨고, 단순히 그들을 사용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려고 하신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
--- 「역사-문화적 맥락」중에서
선이해가 지닌 또 하나의 위험스러운 측면은 우리가 이미 형성된 신학적 의제를 갖고 본문에 다가갈 때 생겨난다. 우리는 우리가 찾고 있는 특정한 관점을 가진 본문에서 시작해, 우리의 의제에 들어맞는 세부 사항을 찾기 위해 본문을 사용한다. 우리가 찾으려는 의미에 들어맞지 않는 본문은 그저 뛰어넘거나 무시해 버린다. 밴후저는 유머스럽게 이러한 행동을 ‘understanding’(이해)이 아니라 ‘overstanding’(고집)이라고 명명한다. 즉 독자인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고 하나님이 본문에서 의미하시는 바를 찾으려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위에 서서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결정하는 것이다.
--- 「우리는 무엇을 본문에 가져가는가?」중에서
맥락과 상관없이 성경 본문을 인용하는 것은, 즐겁고 재미있는 설교를 위해서는 좋을지 몰라도, 결국 하나님의 참된 메시지를 가리는 것이다. 성경을 잘못 읽거나 잘못 해석하는 일은 사람들을 진리와 함께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만들어 해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청년을 다시 생각해 보라. 만일 하나님은 전혀 그런 의도를 갖지 않으셨는데 청년은 정말 하나님이 자신의 애인과 결혼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성경 구절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이 구절을 잘못 이해했고, 결국 그와 애인 사이의 관계에 심각한 결과를 낳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처럼 중요한 관계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여자 친구가 청혼을 거절하면서 그에게 성경 해석 과목을 수강하라고 권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 「문학적 맥락」중에서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라고 확실히 믿는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에 관해,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관해 우리와 ‘커뮤니케이션’하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우리의 느낌이나 욕망에 따라 본문을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불순종이라는 엄청난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는 ‘저자의 의도’라는 해석 방식을 따르는 것이 필수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독자가 의미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의미를 통제한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의 해석 방식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 중 하나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저자에 의해 본문 가운데 놓여 있는 의미를 발견하려 노력한다.”
--- 「누가 의미를 통제하는가?」중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기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기도를 통해 신적 저자와 소통할 때에야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성경 해석과 관련해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지만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성경 해석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지성, 타당한 해석 방법, 훌륭한 성경 공부 자료 등을 사용하길 기대하신다. 성령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신다. 대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역사하신다.
--- 「 성령의 역할」중에서
충실한 성경 독자인 우리의 책무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에 아로새겨진 의미를 적용하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 당신의 삶과 당신이 사는 세상 속에서 핵심 요소들을 담고 있는 수많은 평행적 상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 중에 진정한 평행적 상황을 발견하게 되면, 당신은 성경 본문의 참된 의미를 적용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현실 세계 시나리오를 만들어 냄으로써 혹은 성경 이야기를 동시대화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성경 본문의 의미가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예화와 예시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깊이 스며들어 우리가 사는 방식을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 「적용」중에서
복음서에서 과장법을 만날 경우, 문자적인 해석을 고집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본문의 참된 의미를 놓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오른쪽 눈을 빼어 버림으로써 욕정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상상해 보라. 우리는 성경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문자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유적 언어는 문자적 언어가 담고 있는 것만큼이나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의미(그리고 의미에 준하는 적용)를 담고 있을 수 있다. 과장법을 만나거든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질문해 보라. “여기서 진짜 요점은 무엇인가?”
--- 「복음서」중에서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예언-묵시적 서신이란 문학 장르, 특히 요한계시록에 담긴 이미지들과 연결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이미지들은 하나의 상징 세계를 만들고 있는데, 독자들은 이 세계 속에서 책을 읽거나 들으면서 살고 있다. 독자들이 상징 세계 가운데로 들어갈 때, 이 책의 메시지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변화시킨다. 독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이상을 통해 미래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천상의 시각으로 이 상징 세계 속에 있는 자신의 상황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속에서 현 세상의 마지막 결과, 즉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라는 시각에서 현재를 볼 수 있게 된다.
--- 「요한계시록」중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할 것을 제안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구약 내러티브를 통해 나타내기로 작정하셨다. 분명 이 이야기들을 통해 하나님이 전달하기 원하시는 그분 자신의 속성과 인격이 있다. 구약 내러티브를 읽어 가면서 우리는 이런 곤혹스러운 본문을 어떤 식으로든 설명해 보려고 그곳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본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세심하게 연구함으로써, 본문이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당신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상자 속에 가두려 하지 말라.
--- 「내러티브」중에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약 시를 접하면서 직면하는 문제 중 하나는 이들이 신약 서신서에 적합한 해석 방식을 사용해 구약 시를 해석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런 해석 방식은 구약 시를 해석하는 데 부적합하며, 때로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라파엘로의 그림을 두고 그가 사용한 색상의 주파수를 분석해 해석하려 한다면, 우리는 분명 그가 전달하려고 의도한 메시지의 상당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로마서 3장을 해석하며 사용한 방법으로 시편 51편을 해석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약 시를 바르게 해석하려면, 시 본문에서 이미지의 역할을 바르게 인식하고 우리와 하나님, 그리고 우리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정서적 측면과 이미지의 연결성을 바르게 인식하는 방법을 체득할 필요가 있다.
--- 「시가서」중에서
첫째, 예언의 시적 차원을 간과하지 말라. 즉 당신의 신학적 선이해가 적용과 이미지와 비유적 표현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함부로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예언자들이 기술하고 있는 사건을 특정한 미래 시간표에 맞추려 애쓰지 말고, 그들이 묘사하는 이미지를 파악하기 위한 씨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나 비유적 표현과 씨름한다고 해서 그것 이면에 놓여 있는 문자적 실체를 부정하라는 의미가 아님을 기억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적 이미지를 문자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 땅 위에 초림하심으로 예언을 성취하신 방식은 그분이 미래에 다시 오심으로 예언을 성취하실 것을 암시한다.
--- 「예언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