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삶은 기쁨이어야 한다. 우리는 광대한 우주의 생명 가운데 일부로서 그 개체들과 더불어 이 삶을 더 행복하고 유익하게 가꿔갈 의무가 있다. 이 공생의 삶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런 노력 속에서 우리 자신 또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프롤로그 ‘젊은 그대에게’ 中
아득한 옛날부터 세계는 계속되고 있어. 젊은 세대가 아무리 봄으로 대변되는 세대라 하더라도 탄생과 성장, 죽음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자연의 질서를 겸허히 수용하면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한껏 도모하는 일들일 거야. 그것이야말로 흔히들 행복이라고 부르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지혜란다. 적어도 엄마는 그렇게 생각한단다.---1부 〈청춘〉 ‘사랑하는 딸에게’ 中
그와 겨루려고 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경쟁 따위는 있을 수 없는 거야. 누가 이기고 지고 하는 문제는 없는 거란다. 나는 남녀 간에 싸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던 사람들이 싸운다면 그것만으로도 둘 다 이미 패배한 거나 다름없어. 승리는, 생사를 초월한 승리는 두 사람이 하나로 융화될 때 얻을 수 있는 거야. ---2부 〈사랑과 결혼〉 ‘결혼을 앞둔 딸에게’ 中
누군가는 여성들이 이미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 사회에서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은 대개 여성들이 맡아서 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이 바쁜 이유는 바로 이런 잡다한 일 때문이다. 입법 기관의 어떤 중요한 자리에 다수의 여성이 포진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여성이 바로 그 자리에 남성과 동등하게 앉아 있다면 이 사회의 빈곤과 악정, 수많은 모순들을 좀 더 현명하게 줄여나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2부 〈사랑과 결혼〉 ‘행복한 결혼의 조건’ 中
어렸을 때, 내 용감한 어머니는 남루한 중국옷을 걸치고 얼굴에 갈색 칠을 한 다음 은화를 넣은 헝겊주머니를 차고 어두운 겨울밤 남몰래 거리로 나갔다. 나는 아직 어려서 어머니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도 눈도 검었으므로 중국인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눈은 투명하도록 파래서 어머니와 함께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외국인은 으레 부자로 알려져서 강도의 습격을 자주 받았기 때문이다. 용감한 미국인 아낙네는 죽은 듯한 밤의 고요 속을 통과해서 거리의 성벽에 거적으로 오막살이를 짓고 사는 사람들에게로 갔다. 그러고는 굶주리고 있는 그들 사이로 숨어들어 1달러씩을 나눠주며 다녔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의 굶주림이 끝나고 기근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죽음보다는 삶에 닿아 있었다. 보다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그녀는 가족을, 인류를 그렇게 계속 살려나갔다. 그녀는 항상 삶의 편에 서 있었다. 또 나는 그런 여성의 딸이다. 나는 살기 위해 태어났고, 그러므로 삶을 택한다.
---5부 〈진짜 삶으로 도약하기 위하여〉 ‘철저히 삶의 편에 서라’ 中
어머니는 개인적인 고통이나 괴로움을 남에게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들이 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며 위로할 줄 아는 공감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수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사는 여인들이 거친 자갈길을 걸어 우리 집에 들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슬픔과 고단함에 진심을 다해 귀 기울여주는 단 한 사람, 어머니는 여인들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그들이 어머니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익히 보아왔다. 주목을 끌지 않을 만큼 조용한 아이였던 까닭에 나는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의 모습을 종종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진심은 진심으로 통하기 마련이라는 것, 여자에게는 여자만의 생활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여성, 자신과 먼저 화해하라」 중에서
얼마 전 나는 중서부 지방에 있는 한 여자대학 학장의 방문을 받으면서 이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온후한 인상을 가진 그 중년 남성은 ‘여학생’의 교육 방침에 대해 내 의견을 들으러 왔다고 하면서도 주저하는 기색 하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여성을 교육하는 목적은 결국 남성의 좋은 배우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불평등한 사고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함이라도 외치듯 “그런데 왜 남성을 여성의 좋은 배우자가 되도록 교육하는 곳은 없을까요?” 하고 되물었다. 좋은 배우자가 된다는 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가 서로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려는 노력과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내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나 역시 그를 더 이상 다그칠 생각이 없어 그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많은 부분이 민주화되었지만 남성과 여성에 관한 한 평등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남녀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전무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평등한 교육을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여성과 남성의 만남」 중에서
그러나 대단한 재능이나 열정도 없고 여성으로서의 자각도 없는 일부 여성들은 사회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펼치는 여성들에게 박수를 보내기보다 비난부터 해댄다. 가정과 아이들을 방치한 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고 공격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하는 여성들이 전업주부로 있는 여성들보다 아이들과 질적으로 더 깊은 대화와 교감을 나누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이것은 통계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똑같은 자유를 부여받았으면서도 나태하게 안주하며 그것을 ‘여성의 덕’이라는 말로 포장하며 발뺌해온 이들의 시기에 지나지 않는다. 뭔가 훌륭한 일을 해낸 여성을 보면서 자신도 뭔가를 해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압박감과 불안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여성성은 자신 아닌 다른 것을 흉내 내지 않는다」 중에서
나치를 지지한 또 다른 여성 유형은 이른바 ‘인텔리’ 여성들 중 일부로, 독립된 여성의 길을 택했지만 바라던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있던 여성들이었다. 이 여성들은 자신의 힘이 아닌 사회 변혁에 의지해 기존의 성취 구도가 재편되기를 원했고, 모든 여성들을 결혼하게 해준다는 나치의 약속에도 어느 정도 마음이 흔들렸다. 사회적인 의식도 있고 지성도 갖춘 여성들이 그런 종류의 결혼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믿기는 어렵지만, 어느 나라에나 미혼으로 있기보다는 어떻게든 결혼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실의에 찬 여성들이 있기 마련이다. 결혼이 성공한 여성의 조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한 이런 여성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며, 결혼이라는 미끼를 내걸기만 하면 상대가 비록 나치가 하더라도 기꺼이 한 표를 바치려 들 것이다. 그리하여 애써 손에 넣은 여성의 권리를 자진해 반납할 것이다.
---「나치를 지지했던 독일 여성들은 누구였나」 중에서
그녀들의 태만함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영화관과 공연장에 가보라. 거의 모든 좌석을 채우는 것은 남성이 아닌 여성들이다. 아마도 가전 기기의 발달에 힘입어 가사에 매달리던 시간이 단축돼 다들 그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리라. 게다가 유년기가 지난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그녀들은 마음이 달떠 시내 이곳저곳으로 몰려다닌다.
양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여성이라면 영화를 보고 돌아와 오히려 더 많은 생각에 잠길 것이다. 자신의 삶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돌아보고, 결과적으로 자신을 가정에 묶어버린 결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 번쯤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아마도 결혼이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곤란하고 수치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을지를 떠올리며 애써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전형적인 구습이 작용한다. 결혼하지 않은 것은 여자로서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그것으로 다른 모든 고민과 문제를 충분히 덮을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교감 없는 관계는 남녀 사이를 위태롭게 한다」 중에서
그래서인지 나는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고 되묻는 여성을 만나면 늘 기쁘고 든든한 마음이 든다. 반면 이런 말을 하는 여성들은 한없이 불쌍하고 때로 경멸스럽기도 하다.
“결혼을 하고도 직장에 나간다니 참 안됐죠? 지금껏 편안하게 남편에게 의지해오다가 말이에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남편에게 평생 동안 부양받을 권리는 없다. 그러므로 일을 시작하는 여성들은 동정이 아니라 축복을 받아야 한다. 그녀들은 이제 노동 끝에 찾아오는 피로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며, 심신을 다해 일하는 고통에 대해서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일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완전한 자기 망각이 어떤 충만함과 기쁨을 주는지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다. 그럼에도 많은 현대 여성들이 이 특별한 권리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 같은 여성으로서 나는 많이 안타깝다. 불평을 쏟아내면서 자신들이 바라왔던 참된 자유와 스스로에 대한 긍지가 바로 거기에 있는데도 말이다.
---「현실적인 대안은 일하는 여성들에게 있다」 중에서
“한꺼번에 과오를 고칠 방법이란 건 없습니다. 어떤 부류의 여성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불가능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가장 비극적인 사람들은 중년기를 맞은 여성들이에요. 출산과 육아에 대한 의무도 어느덧 끝나버리고, 자식들마저 하나둘 독립하기 시작하면서 실질적으로 가정에서 맡아왔던 역할이 사라져버리는 시기가 바로 그때니까요. 그래서 이 시기의 여성들이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원숙한 경지에 다다랐음에도 자신이 용도 폐기된 무용한 존재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빠져 절망하는 겁니다. 이때가 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 오래전부터 계획을 세워두었어야 했다는 후회를 곱씹으면서 말이지요. 결혼 초기부터 늘 이 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지 준비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사실 중년기에 뭔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건 중년 남성이 직업을 바꾸는 것처럼 아주 어려운 일이지요.”
---「희망은 충분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