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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 푸를 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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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0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432쪽 | 542g | 134*200*26mm
ISBN13 9791165348328
ISBN10 1165348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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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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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렴. 이 어미의 오랜 벗이란다. ‘벗’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바라본 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있었고, 닿지 못할 온기가,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있었다. 어여쁘지? 눈도 떼지 못하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찬란하게 부서지는 빛무리는 과연 어여쁘다는 말로는 부족해 보였다. 아버지께는 비밀. 가늘고 긴 손가락이 입술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쉿, 이어지는 웃음기 띤 목소리에 채희는 누가 발바닥이라도 간지럽힌 것처럼 몸을 배배 꼬며 함께 웃었다. 비밀.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신비롭게 만들어주는 단어였다.
--- p.7

“다들 정말 너무해. 다른 것도 아니고 혼인이잖아! 내 평생이 걸린 일이라고! 근데 왜 내 얘긴 아무도 안 들어주는 거야?”
“그래요. 말 나온 김에 들어나 봅시다. 남들은 못 가서 안달이라는 자리가 대체 왜 싫으신데요?”
때마침 두 사람을 마중 나오던 동자가 점점 높아지는 언성에 그대로 멈춰 섰다. 먼저 올라와 짐을 풀던 지게꾼들이나 행자들도 어느덧 이들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채희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말생은 양손까지 허리에 올리며 그것 보라는 듯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다들 놀란 와중에 채희만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턱을 치켜든 채 외쳤다.
“못생겼어!”
“그야 사람이 좀! ……네? 그 얼굴이요?”
“응. 이목구비가 아주…… 제멋대로야.”
--- p.16~17

“저, 저기요.” 용기 내어 어깨를 툭 건드리자 의식이 없는 줄만 알았던 아이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하얗고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카악 하고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주춤 물러선 채희가 자신을 매섭게 올려다보는 두 눈에 잠시 넋을 놓았다. 아이의 눈은 바다를 콕 찍어 발라놓은 것 같은 푸른색이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상처들에 피와 모래가 뒤엉켜 엉망이 되었음에도 순간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눈과 얼굴에 머물던 시선이 헐벗은 상체를 지나 물고기처럼 비늘로 덮여 있는 하체에까지 닿았을 때, 채희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인……어?”
--- p.30

산해경(山海經) 이게 뭐라고 그 여린 여인이 밤낮없이 서책 방을 헤매다 앓아눕기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그리 앓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대제학께 구해달라 사정했다지. 대제학 속이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또랑또랑하게 제 할 말 다 했을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p.95~96

검집에서 뽑힌 검은 더욱 당황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생선 가시 같은 날이라니. 태어나 처음 보는 모습에 채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도 이런 건 처음 봤습니다.”
무심코 날에 손을 대보려던 채희가 제 속마음을 읽은 듯한 말에 얼른 손을 거두었다.
“대체 이게 뭡니까?”
“검입니다.”
“예?”
“뭐든 이뤄주는 신묘한 힘이 있는 검.”
세상에 그런 검이 어디 있느냐 비웃으려던 채희가 확신에 찬 윤성의 얼굴 보고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 p.142

“네 이름이야. 내가 전에 하나 지어주기로 했잖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어디서 뭘 하느라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느냐고 물어야 하는데. 뜨끈한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무심코 곁을 돌아본 채희는 어느새 바짝 붙어 앉은 인어 탓에 다시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저와 같은 방향에서 종이를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나 등에 닿는 가슴 하며, 귓가에 스치는 숨결이나 어깨에 닿는 턱 따위가 유난히도 신경 쓰였다. 인어가 보기 편하도록 종이 방향을 바꾸어주는 채희의 손이 정처 없이 떨렸다. 인어가 살짝 돌아보는 게 느껴졌으나 도저히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오로지 종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리, 린이야. 린. 물빛 푸를 린.”
--- p.182

생긋 웃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린이 채희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힘주어 버틸 새도 없이 기울어진 몸이 매끈한 상반신을 덮치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손바닥을 찌르르 울리는 아릿한 통증에 입술을 깨물기도 잠시, 질끈 감았다 뜬 눈앞에 놓인 잘생긴 얼굴에 숨을 삼켰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어느 틈에 이 지경까지 된 건지 채희는 린 위에 반쯤 올라탄 채 한 손으로만 간신히 바닥을 짚고 있었다. “이, 이건 네가 갑자기 잡아당겨서…….” 그러니 놓으라고, 빨리 일어나고 싶다며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봤지만, 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벗어나려 할수록 더 강하게 끌어당길 뿐이었다.
--- p.213~214

수정을 건네주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인간이 청혼의 의미로 빗을 주고받는 것처럼 인어들 역시 청혼의 의미로 투명하게 깎아 만든 수정 구슬을 주고받는다는 것, 누구로 인해 성장기를 겪었으며, 성장기가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입에 담지 못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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