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스틱 믿음이란 말은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이다. 나 역시 그렇다. 믿음이나 믿는 자에 대한 비하, 혹은 모독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쓰는 것은 그릇된 믿음에 대해, 그리고 이 시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 이해와 그 성향에 대해 우리 스스로 자성하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나 우리의 공동체인 교회가 이 슬프고도 안타까운 결함을 벗어 버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믿음, 살아 역사하는 믿음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플라스틱은 이 세상 편리의 산물이다. 세상에 플라스틱만큼 편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시대 사람들은 감히 플라스틱 없는 세상을 말하거나 꿈꾸지 못한다. 우리 믿는 이들이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키려 하는 것은 당위이다. 그런데 우리까지 일상에 있어 플라스틱 없는 날을 보지 못하고, 플라스틱과 함께 매일 살아가고 있다. 바로 그 플라스틱의 존재 이유, 그 중심은 무엇인가? 편리이다. 확실히 그렇다. 간단하게, 잠시 쓰고 버리면 되는 것이 플라스틱이다. 바로 이 편리함이 우리 시대에 있어 종교처럼, 신앙처럼 삶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인간이 만든 플라스틱으로 인해 몸살을 앓으며 죽어 가고 있다. 땅도 하늘도 오염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바다까지도 그렇다. 보이는 플라스틱도 문제이나 보이지 않는 미세플라스틱은 더욱 큰 문제이다. 세탁물 1kg에 미세플라스틱 50만 개가 나온다고 한다. 그것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 적이 되고 있다. 무섭다. 상상만 해도 아찔하고 답답하다. 우리와 우리의 후손은 직간접으로 플라스틱 공해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참을 만한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를 회색 지대로 만드는 생명에 역행하는 오염인 것이다.
플라스틱은 사람이 만들었다. 사람이 만든 플라스틱은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줄 생명도 없다. 플라스틱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단지 편리를 줄 뿐이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바로 이 편리가 신이 되어 자신의 생명을 파묻는다. 플라스틱, 그리고 플라스틱이 주는 편리 의존은 결국 자신을 힘들게 한다. 자신뿐 아니라 세계도 하나님도 힘들게 한다. 우리 삶과 우리 신앙에 있어 힘 안 들게 하는 것이 가장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쉽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가치관은 정확히, 그리고 결국 자신에게 처절함을 가져오는 배달부와도 같은 것이다. (…)
--- p.17~19
(…) 인간의 행동은 살아 있음이요, 무언가 닮아 가는 과정이다. 믿음의 행동은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이고,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과정이다. 그리스도는 믿음과 섬김에 있어 하나님이 인간 앞에 세운 본(本)이시다. 그의 섬김과 삶은 본을 보여 주심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는지를 본으로 삼아 믿어야 한다. 바로 그 본을 보이기 위해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고,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믿는 것이 무엇인가? 믿음은 정확히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다. 그것은 좁은 길이고 고난의 길이다. 그가 우리의 길(요 14:6)인 것은 그가 우리의 삶의 방식이란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믿음은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영적 기형이다. 닮는 것은 순간으로 끝나는 믿음이 아닌, 일생 지속하고 힘쓸 믿음이다.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아닌가? 왜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말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은 적은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을 사는 과제를 왜 저버리는 것인가? 그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믿음의 그 무거운 과제를 쉽게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
--- p.137~138
(…) 한국교회는 믿음이나 은혜, 그리고 구원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용서받고 구원 얻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쳐 왔다. 틀리는가? 그렇지 않다. 맞지만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더러 믿음만 말하고 곧바로 구원으로 간다. 행위는 빼놓고 믿음만 주장한다. 행위 없는 믿음이 아닌, 행위 있는 믿음을 갖되 행위를 자랑하지 않는, 행위를 공적(merit)으로 내세우지 않는 단계로 가야 하지 않을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맞지만 의롭게 된 자는 믿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 머물러 있음은 항상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살아 있음으로서의 행동이 요구된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믿음의 삶이 뒷받침될 때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행위 없는 믿음이나 행위 없는 은혜를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항상 행동으로 표현되는 믿음, 삶을 담은 은혜를 엮어 낸다. 한국교회에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은 자주 행위를 배제한다고 주장한다. 구원에 있어 행위는 필요치 않지만, 구원 얻는 믿음을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다. 행위로 입증하는 과정이 믿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삶을 방해하는 은혜나 그런 믿음이나 그런 칭의는 교회에서 아무것도 못한다. 믿음이나 은혜에 행위가 없다는 것은 악성 교만이고 무지이며 불순종이다. 이런 교회는 자기 의를 내세우며 싸우는 사람들을 양산했다. 이런 교회나 이런 믿음에서는 아무리 은혜를 말해도 그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는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것은 값싼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틀리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서도 왜 우리는 은혜를 모르거나 은혜 밖에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나 삶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행위로 우리 삶의 내용을 짜 간다. 그렇게 해 볼 때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안다.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상처 입고, 아프고, 실패한다. 온 힘을 다하고 온 마음을 쏟았지만 거두는 열매는 빈손이기 일쑤이다. 은혜는 바로 그때 가서 안다. 그 거쳐 온 험한 길이, 눈물 흘리며 걸었던 아프고 슬펐던 사연들이, 자신의 약함과 죄 많음과 부족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비춰 주는 거울과 같다. 은혜는 믿음을 지킨 자의 고백이며, 순종하여 행한 자의 감사이고, 죽음의 골짜기를 거친 자가 가진 찬송인 것이다. (…)
--- p.26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