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의 비유를 읽으면서, 정말로 가까운 세계, 곧 우리의 세계라는 시끌벅적한 무대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의미를 밝힐 수 있는 정확한 시작점을 확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그림들이 우리를 교과서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가 우리에게 그림들을 해석해 준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든 사물의 핵심이 우리에게 사물을 열어 주는 것이지, 사물이 그 핵심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그림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그림책”입니다.
--- p.19, 「독자에게」 중에서
이처럼 우리도 주님을 아무런 왜곡 없이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알맞은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어떤 유력자나 영웅으로, 도덕 설교가나 종교 창시자로 착각하지 않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주님과 만나는 인물들, 혹은 그분의 비유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서 있는 자리로 다가가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예컨대 요한이 투옥되어 절망적인 물음 속에서 주님을 부르는 자리,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가나안 여인이 서 있는 자리, 하나님의 자리에서 맘몬을 몰아내지 못하고 불행하게 떠나간 부자 청년이 서 있는 자리에 우리도 서 보는 겁니다.
--- p.25, 「돌아온 탕자 Ⅰ」 중에서
“믿음”이 더는 기쁨도 아니고 해방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엄청난 통찰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고 선물이며,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잊는다면, 이 모든 것을 더는 경험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아프고 괴로운 양심을 안고 떠도는 것, 무의미라는 공허함에 시달리는 것, 우발적 사고와 운명의 감시를 받는 것, 남모르는 의무들에 묶이는 것, 그런 다음 다시 눈을 들어 아버지의 마음과 살아 계신 구원자를 모시는 것, 이 모든 것을 더는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잊는 것은, 우리 믿음의 죽음이 될 수 있습니다.
--- p.55, 「돌아온 탕자 Ⅱ」 중에서
어쩌면 우리는 이지적인 면에서 양서(良書)와 주요 위인전을 즐기는 타고난 부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약한 인상을 주는 소년과 소녀 가운데 영화와 섹스, 잡지와 바보상자인 텔레비전 사이를 오가며 생활하는 이들을 경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얼마나 불행하게, 얼마나 공허하게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요? 우리가 우리의 풍부하고 깊이 있는 기독교적이며 영적인 생활의 우월감 안에서 그들을 점점 더 불행에 빠뜨리고, 뒷문 신세로 남아 있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지요?
--- p.72,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 중에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행복한 존재는 없습니다. “살짝 건드려지기만 한” 그리스도인들, 수천 개의 씨가 뿌려졌는데도 삶에 뿌리가 전혀 없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부패한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1차 회오리 돌풍에도 무너지고 맙니다. 반거충이 그리스도인들은 1차 재앙이 닥치기만 해도 곧바로 시들어 죽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건조한 지성과 그들의 피상적인 감정이 견뎌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던 것까지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 p.97, 「네 가지 밭」 중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폭발력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져 있는 자그마한 영향력이라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식별되는지 검사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업장에, 내 마음속이나 다른 이의 마음속에 심긴 나무의 가지들 아래서 살 수 있는 사람이 한둘이라도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그 나무의 그늘 속에서 힘과 원기를 얻는지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내 우리의 경건 속에서 닭이 울기 전에 누구를 세 번이나 부인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 돌려,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 p.114, 「겨자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