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사람들에게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꿈꾸게 했을, 신분과 성별을 비롯해 자신을 제약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고 시련을 견디며 자신의 진짜 모습들을 찾아가는 여성 인물들의 전통은, 어쩌면 읽고 쓰는 사람들의 눈과 손을 통해 계속 이어져, 지금의 여성 작가들과 여성 독자들이 쓰고 읽으며 만나는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또 다른 영웅들의 계보일지도 모른다고, 이 책에 언급한 옛이야기들을 다시 읽어나가다가 때때로 생각했다.
--- p.9
한때는 버림받은 딸들이었고, 자라서도 수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작게는 가문 크게는 국가라는 이름의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때로는 나라를 구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구하며, 때로는 다른 여성을 위험에서 구해내는 이들,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들이자 세계와 불화하는 자들이며 어머니이자 딸이고 자매들인 이들, 사회적 약자이자 타자이며 때로는 모험을 떠날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이들이 바로 옛이야기 속 여성 영웅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상처 입은 어린이나 버림받은 딸, 사회생활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계속되는 차별을 겪으며 소외되었던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한편, 이들의 영웅적인 여정에서 또 다른 용기를 얻는 것이다. …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거나 세상의 끝을 향해 모험을 떠나지 않아도, 이들의 도전과 반란은 타자화된 별종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 자체로 또 다른 영웅의 이야기이자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 p.26
만약 『장화홍련전』에서 아들인 장쇠에게 더 많은 재산을 주기 위해 위의 두 딸을 핍박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이 계모 허씨가 아니라 배 좌수였다면 장화와 홍련은 원귀가 되어 돌아올 수조차 없었다. … 가족 안에서의 학대에 대해 피해자들이 합법적으로 원망하거나 복수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가족이지만 온전한 가족이 아니고 부모이지만 혈연이 아닌 돌출된 존재인 계모뿐이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현실에서 차별이나 학대를 받는 피해자들에게 공감을 사고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죄를 계모에게 부당하게 뒤집어씌운 채, 현실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학대를 못 본 척하기도 했다. 과거는 물론 현대에도, 『장화홍련전』이나 『콩쥐팥쥐전』을 읽는 현대의 독자들, 의붓어머니에게 주인공이 학대당하는 홈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겪는 비극과 계모의 악행에만 집중할 뿐, 아버지의 묵인이나 무관심은 쉽게 지나친다.
--- pp.122~123
결국 마지막에 사정옥은 유연수와 재회해 다시 유씨 집안의 부인이 되고, 아들인 인아와 재회하고, 시가와 친정 양쪽의 이름을 드높이지만, 그곳에 사정옥이라는 개인은 없다. 가부장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인인 사정옥의 모든 행동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유연수와 유씨 가문을 위해 맞추어져 있을 뿐, 자기 자신의 자아나 욕망은 아예 말살된 것처럼 보인다. 남성 사대부 작가가 당대의 정치를 비판하려고 썼던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가부장제가 부덕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여성의 인격을 말살하는지, 가부장제의 이상에 최적화된 여성이라도 남성의 변덕에 의해 내쳐질 수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p.144
사랑하는 두 사람과 그를 가로막는 권력자란 시대를 막론하고 인기 있는 소재이며, 안생의 아내는 남편에게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끊은 열녀였다. 하지만 이를 기록한 사대부들은 안생의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간 하성부원군의 무도한 폭거를 비난하지 않는다. 사대부의 관점에서 노비는 물건이나 다름없고, 양반이 제 소유물인 노비에 대해 재산권을 행사하는 것도, 안생이 권력자인 부원군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 한낱 여성 노비의 절개를 칭송하기 위해 권력자인 부원군의 정당한 재산권 행사를 비난할 수 없었던 당대 남성 사대부들은, 안생의 아내를 남편 앞에서 서러운 눈물만을 흘리고 조용히 사라질 뿐 가해자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가해자가 원하는 ‘피해자다운 피해자’로 만들어버렸다.
--- p.202
『박씨전』에서 박씨의 대척점에 선 인물은 후금의 지배자 호왕이 아닌 그 아내, 호귀비다. 호귀비 역시 박씨와 마찬가지로 천문과 지리에 능한 영웅이고, 후금의 승리는 호귀비의 전략 때문이었다. 또한 이들은 평범한 계집종이었으나 박씨의 시녀가 되어 그 가르침을 받고 용율대와 맞서 싸우는 계화나, 호귀비의 측근으로 검술 솜씨가 뛰어나 조선에 자객으로 오게 되는 기홍대와 같이 자신의 뒤를 이을 유능한 여성 인물을 길러낸다. 그들의 후계자는 아들이나 소년이 아닌, 자신보다 어린 여성이다. … 『박씨전』은 한 사람의 뛰어나고 완벽한, 그래서 남성 영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여성 인물을 유일한 주인공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적대 관계에 놓인 여성 영웅, 여성 스승과 여성 제자의 관계 등을 다양하게 보여주며 여성 영웅들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 pp.259~260
직접 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이들에게 현실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남성이란, SF 장르에서의 슈퍼로봇과 같다. … 『박씨전』에서 박씨와 호귀비는 각각 여성의 옷을 입고 내당과 구중궁궐에 앉아, 이시백과 호왕이라는 남성을 조종해 서로 맞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조선시대에 현실적으로 여성이 사회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당시 소설을 짓고 전파하며 향유하던 사람들은 이들 비범한 여성 영웅들에게 유능한 남성 대리인을 내세우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장을 한 여성들은 남성 대리인을 슈퍼로봇처럼 ‘조종해’ 현실에 영향을 끼친 주인공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들은 영웅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여자로 태어나, 시대의 한계로 남자의 옷을 SF 장르의 강화복처럼 ‘입고’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형태로 자신을 ‘위장’한 뒤 세상에 나온다. 이들에게 남성의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마법소녀나 슈퍼 히어로의 수트와 같다. 이들이 남성의 옷을 입은 동안에는, 사람들은 이 영웅이 실은 여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 pp.263~264
이야기 속에서야 선녀나 용왕의 딸 등 신비롭고 고귀한 여성이 인간 세상에 태어나 여성 영웅이 되고 신이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여성은 기본적으로 신선이나 이인이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데도 이들 여성 주인공들은 사회로 나아가려면 남장을 해야 하고, 과거 시험을 보면 장원급제를 해야 하고, 『박씨전』의 박씨가 도술을 쓰는 것 이상으로 비범한 행적을 보여야만 한다. 이야기 속 다른 남성 인물, 특히 여성 영웅의 배우자가 되는 남성들은 그런 이적을 보이지 않아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존중받지만, 우리의 주인공들은 천문을 보고 앞일을 내다보고, 단기필마로 적을 쓰러뜨리고, 집안에 팔진도를 구축하는 정도의 신이한 행적을 보여야만 태생부터 비천한 여성이 아니라, 남성과 비슷한 정도의 인간 대접이라도 받을 수 있다. … 『홍계월전』은 남성보다 우월하고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지닌 홍계월 같은 영웅도 남편과 사회에게 멸시당하는데, 하물며 평범한 보통 여자들이 겪는 현실의 차별이란 어떤 것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 pp.276~277
당대의 여성 독자들이 『방한림전』을 통해 여성과 여성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을 보았다면, 현대의 독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성적인 열정 없이도 서로에게 애정과 그리움을 품고 상냥함과 헌신, 존중과 예의로 서로를 대하며, 입양한 아이를 함께 돌보는,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국가의 인구를 늘리고 가문의 대를 이을 자식을 생산하는 재생산이 아니라, 남성을 가부장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혼인이 아니라, 가부장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우정으로 맺어지고 행복과 책임감을 기반으로 하는 평등한 공동체를 꾸린다는, 당연한 권리로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만 아직 생활동반자법도 통과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취약한 그 관계를, 조선시대의 소설 『방한림전』은 이미 앞질러 꿈꾸고 있었다.
--- p.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