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늦은 시기에 제가 걸어온 수십 년의 여정을 돌이켜 보면 감사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온갖 좋은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생명을 주셨고, 여러 혼란의 순간마다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넘어질 때마다 항상 일으켜 세워 주셨고, 당신 얼굴의 광채를 새롭게 비춰 주셨습니다. 떠올려 보면 제 인생 여정에서 지치고 어두웠던 시간조차 저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저를 잘 인도해 주셨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그분의 몸입니다.
--- p.5, 8~9, 「나의 영적 유언」 중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참조) 그리고 성령 강림의 순간, 제자들은 여러 언어로 말을 하게 됩니다. 성령의 힘으로 신앙의 모든 충만함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교회는 모든 대륙에서 성장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존재는 교회의 보편적인 모습을 반영합니다. 즈카르야 예언자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게 될, 평화의 왕국이 될 메시아의 왕국을 선포하였습니다(즈카 9,9 참조). 그리고 실제로 주님에게서 시작해 성찬례가 거행되는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서로 한몸이 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평화가 존재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분열과 폭력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의 협력자가 되어 교회의 사명을 선도하고 보호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 p. 27, 「선교를 통해 성장하는 그리스도교」 중에서
종교는 그 자체로 단일한 현상이 아니기에 그 안에서 더욱 많은 차원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종교에는 세상을 넘어 영원하신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인간 역사와 종교의 경험에서 파생된 요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편 종교 안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나, 저급하고 파괴적인 것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기주의는 종교를 장악해 그곳을 열린 공간이 아닌 폐쇄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결코 단순히 긍정적인 현상 혹은 부정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종교 안에는 이 두 가지 측면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 p. 31, 「선교를 통해 성장하는 그리스도교」 중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까지 사람이 되어 견디어 내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교의 중심인 것이다. 하느님과 신들 사이에 놓인 종교의 역사에 대한 모든 논쟁은 하느님께서 여타의 맹목적 숭배의 대상처럼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신들 위에 계신 유일한 참하느님의 승리로 끝난다. 이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전제된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전달함으로써 완전한 인격체가 된다.
--- p. 43, 「종교란 무엇인가―종교의 원천에 계신 하느님」 중에서
서양 음악의 위대하고 순수한 응답은 전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 발전되었습니다. 저에게 이러한 음악은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보여 줍니다. 이러한 응답이 발전되는 곳에 진리와의 만남, 세상의 진정한 창조주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성음악은 언제 어디서나 연주될 필요는 없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에 항구한 의미를 지니는 신학적 차원의 실재입니다. 또한 전례에서 성음악이 사라질 수 없으며, 성음악의 존재가 신앙의 신비 안에서 성스러운 미사 거행의 참여에 매우 특별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 p. 81, 「음악과 전례, 하느님을 찬미하는 무상의 선물」 중에서
새 계약이라는 주제는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후기 이사야서, 호세아서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에제키엘서 16장의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에 관한 묘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하느님께서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최종적인 계약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신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계약을 지키지 않았으며 온갖 신들과 음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하느님의 진노는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을 더 이상 깨트릴 수 없는 새로운 계약으로 데려간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지금 탐구하고 있는 ‘결코 철회될 수 없는 계약’에 관해 하느님께서는 그 어떠한 것도 취소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이 옳다.
--- p. 127~128, 「철회되지 않는 은총과 부르심」 중에서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약속을 더 넓은 이해의 지평으로 읽었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수난과 그에 따른 의인들의 고통이 점점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예수님께서 표현하는 이미지에서도 승리주의가 특별히 강조되지는 않는다. 이는 인간을 위한,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특징적 모습이다. 하느님 나라의 밭에서는 밀 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지만 가라지가 뽑히지 않는다. 하느님의 그물에는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있다. 하느님 나라의 누룩은 천천히 스며들어 세상을 변화시킨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대화를 통해 십자가가 메시아 모습의 참된 중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p. 188, 「철회되지 않는 은총과 부르심」 중에서
믿음은 하느님과 개인이 맺는 깊은 접촉입니다. 이 접촉은 개인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며,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 나를 절대적이고 즉각적으로 내어놓도록 합니다. 또한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말씀을 드릴 수 있게 하며 그분을 사랑하게 하고 친교를 맺을 수 있게 합니다. 즉 믿음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의 가장 개인적인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는 공동체와 분리 불가분합니다. 그것은 ‘나’라는 개인을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며, 배회하는 형제자매들의 공동체 안으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앙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또한 하느님과의 만남은 닫혀 있는 개인의 고독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개방하게 합니다. 이는 개인이 교회의 살아 있는 공동체에서 환영받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동체적 만남의 중재자이며 동시에 전적으로 개인적인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 p. 151, 「믿음은 관념이 아닌 삶입니다」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상승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그분을 향해 우리가 다가가는 가운데 실현됩니다. 만남이 이루어지는 지점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향해 내려오시는 가장 깊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상승의 절정, 즉 인간의 진정한 ‘고양高揚’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버지 앞에 나아와 봉사하는 것”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부르심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상승과 하강의 현존으로서의 성체성사는 그 자체를 넘어 항상 이웃 사랑에 봉사하는 다양한 방법을 가리킵니다.
오늘, 주님의 부르심에 다시 한번 우리가 “예.”라고 말할 수 있는 은사를 주님께 청합시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 아멘.
--- p. 214~215, 「가톨릭 사제직의 소명」 중에서
신이 부재하는 사회, 더 이상 신을 알지 못하고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듯 여기는 사회는 기준을 상실한다. 우리의 시대는 ‘신의 죽음’이라는 표어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사회에서 신이 죽는다면 그 사회는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한 사회에서 신이 죽는다는 것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므로 자유의 종말을 의미한다.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기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 p. 272, 「어둠에서 빛으로―가톨릭 교회의 성 학대 추문을 바라보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