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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감

: 한국고대사를 비춰 보는 거울

[ 양장 ] 우리국학총서-05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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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14년 03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704쪽 | 1278g | 152*225*40mm
ISBN13 9791185614007
ISBN10 118561400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의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우리 고대사에 널리 쓰였던 우리 말들의 원형과 그 속에 깃들인 고대사의 실상을 70종이 넘는 한국과 중국의 사서 및 고문헌들을 정밀히 분석하여 밝혀낸 항일투사이자 언론인 안재홍선생의 역저를 발간 67년만에 현대어로 풀어내다.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우리국학총서(國學叢書)〉를 펴내며 11
권두에 씀 13
일러두기 18


1장. 기자조선에 대한 고찰
- 기자조선의 존재에 대하여 27
1. 조선은 ‘기’의 나라 28
2. 언어민속을 통해 본 ‘기’ 30
3. 관직, 인물, 지명 등에 나타난 ‘기’ 32
1) 고문헌상의 ‘기’와 관련된 어휘 32
2) 기산(箕山), 질산(質山), 후산(侯山) 등이 통용된 예 33
3) ‘기’는 대인 또는 수장이라는 뜻 35
4) 대인국(大人國)과 대인지시(大人之市)의 실상 36
5) 차차웅(次次雄)과 자충(慈充)의 뜻 39
6) 신라 문헌에 등장하는 ‘지(智)’와 공(公)의 의미 41
7) 고구려, 백제의 관직명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와 ‘치’ 44
4. ‘기’를 중심으로 본 사회발전사 요약 49
- ‘기’로 표시되는 단계 과정 49
5. 귀족, 재상으로서의 ‘기’ 52
1) 신라, 가야, 마한, 백제와 관련된 여러 문헌 52
2) 마한의 신지(臣智) 58
6. 대공국(大公國)의 병립시대 61
1) 구태(仇台), 근지(近支), 한기(韓岐), 신지(臣智)의 열국시대 61
2) 크치조선(朝鮮)과 기자조선 62
3) 큰지국(國)과 군자국(君子國) 64
4) 한기국(國)과 한후(韓侯), 한성(漢城) 67
5) 신지국(臣智國)과 진한(辰韓), 진국(辰國) 69
7. 고대 문헌상의 군공(群公), 제후 71
- 고구려와 신라의 군공과 제후 71
8. 대공조선(大公朝鮮)의 진상 75
1) 크치조선의 문화 정비 - 기자조선과 뒤섞인 과정 75
2) 크치의 활동과 지위의 상승 78
- 부여, 고구려, 백제, 마한, 신라, 가야 등의 실례 78
3) 한(韓)씨의 종족상의 의미 82
9. 크치조선의 국가 상황 84
- 주나라 말에서 한나라 초까지의 대공(大公)조선 84
10. 부기(附記) - 대체로 같은 법속(法俗) 88
2장. 아사달과 백악, 평양, 부여에 대하여
- 원생지(原生地)를 중심으로 발전된 고대 사회 91
1. 백악, 평양, 부여와 아사달의 상호 관계 92
1) 아사달의 뜻과 백악과의 관계 94
2) 아사달의 다른 이름 평양성 98
2. 복지(腹地)와 잉양(孕壤)으로서의 백악과 100
아사달의 관계 100
1) ‘?아(백악)’와 관련된 문헌 자료와 원래 의미 100
2) 아사달과 관련된 여러 문헌과 참모습 110
3.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이 합일된 고대 문화 115
1) 태양, 태악(太岳), 두뇌 및 자생신(?生神) 115
2) ‘?’, ‘?’, ‘?’와 원생지 118
4. 종족이 탄생하고 모여서 국가를 이룬 인류 문화 122
1) 부여는 종족이란 뜻 122
2) 모계시대 이후의 사회 단계 123
5. 인류 문화사에 나타나는 하나의 전형 126
1) 두산(頭山)과 복지(腹地)는 연관적 존재 126
2) 아시리아(Assyria)와의 비교 127
6. 결론 129
7. 부기(附記) - 단(檀)과 단(壇), 두 글자의 구분 131
3장. 고구려 건국 상황에 대한 고찰 135
1. 오부(五部) 조직의 문화적 의미 135
2. 곤연, 웅심산, 우발수 등의 의미와 위치 137
3. 새로운 신황(神皇)인 동명제(東明帝) 141
- 그 밖의 인명과 지명의 뜻과 배경 141
4. 오부(五部)의 의미와 고구려 국명의 기원 149
5. 건국 과정 및 국가 발전 상황 152
1) ‘?어’로 일관된 네 개의 도읍과 3경 153
2) 부여 문화의 집성자 154
3) 단군이란 명칭의 계승자 156
4) 부여국과 단군 호칭의 존속 157
5) 구려국(句麗國)의 유래 및 고구려의 발흥 157
6) 부족연합의 편린과 그 여파 159
7) 제가(諸加)회의를 통하여 결정하는 법속 161
8) 농목사회의 문화 요소 164
4장. 고구려 관직에 대한 고찰 167
1. 고구려사와 그 관직에 대한 고찰 168
2. 여러 문헌에 나타난 관직 168
1) 부여공(夫餘公)인 패자(沛者: ?치)는 국사를 총괄하는 높은 관직 169
2) 최고의 대공(大公)인 고추가 174
3) 태대경(太大卿)과 대경(大卿)은 ‘신크치’와 ‘크치’ 176
4) 상경(上卿), 상서(尙書)로서의 우치 177
5) 진무(鎭撫)도독인 살치(어사대부) 179
6) 교화를 담당한 조의두대형(?衣頭大兄) 183
3. 오관(五官)의 주요 업무 185
4. 오관과 정부 구성 187
5. 오관 이하의 여러 관직 188
6. 결론 - 기, 지, 치로 표현된 십이관등(十二官等) 190
5장. 신라 건국 상황에 대한 고찰
- 육훼평에 대한 논의를 겸하여 192
1. 신라의 기원과 의미 193
1) 《삼국지》 편자가 전하는 내용 197
2. 신라의 건국 상황 198
1) 혁거세왕과 고대 사회의 신정(神政) 199
2) 해척아기와 성모시대 201
3) 촌락정치에서 도시연합국가로 204
4) 혁거세와 천지인(天地人) 삼황(三皇) 207
5) 소벌공과 서술신모 211
6) 계림과 그 의미 216
7) 육부연합의 형태 218
8) 육부연합과 종교적 요소 221
3. 결론 - 진방(震方) 역사의 전체적인 체계 223
6장. 신라 관직에 대한 고찰
- 관직을 통해 본 사회사의 한 측면 228
1. 신라의 전반적인 국가 상황 228
- ‘?의뉘’로부터 ‘닛검’의 출현까지 228
2. 독자적 특징을 보인 신라의 관직명과 관직 232
1) 이벌찬과 승부대경(乘府大卿) 232
2) 이척간과 승정장관(承政長官) 234
3) 호위무사의 우두머리인 잡찬(?飡) 241
4) 농경을 관리한 파진찬 242
5) 이부(吏部)의 우두머리인 대아찬 244
6) 예부(禮部)의 우두머리 일길찬 245
7) 대사자(大使者)의 역할을 한 살찬 247
8) 제후를 통치하는 급벌찬 248
9) 지(智) 또는 지(支)로 표현된 하급 관리 명칭 249
3. 결론 250
7장. 삼한국(三韓國)과 그 법속에 대한 고찰 252
1. 한(韓)과 그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 253
2. 삼한 습속의 전체적인 모습 255
3. 세 명의 간(干)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법속 262
4. 마한, 진한, 변한의 명칭의 의미와 기원 267
1) 삼한(三韓)과 오가(五加)의 의미 267
2) 종주국인 마한 274
3) 진한의 의미 278
4) 가라열국은 변한 281
5) 변한과 불례(不例), 구야(拘邪) 284
5. 삼한의 상호 관계 287
6. 삼한 관련 기록의 새로운 해석 295
7. 마한 진왕을 우대하여 부르는 법속 300
8. 삼한국과 사회 형태 304
9. 삼한을 통해 본 진역(震域)의 고대 제도 307
10. 부기 - 아시리아와 비교 312
8장. 육가라국(六加羅國)에 대한 고찰 316
1. 가라의 어원 316
2. 가라의 건국과 전후 상황 - 금관국의 참모습 320
3. 여섯 가라의 위치와 지리적 특징 322
1) 큰지한이 다스리는 나라 322
2) 아시량(阿尸良)과 아라가라(阿羅加羅) 323
3) 대가야의 발흥 325
4) 성산(星山)가야 325
5) 곡지(谷地)가라 326
6) 고성반도의 소가라(小加羅) 327
4. 가라연맹의 흥망에 대한 개관 328
5. 대가라의 국가 상황 개관 329
1) 읍차국(邑借國)의 발전 순서 329
2) 정견모주와 법우화상 330
3) 국제혼 기록 331
6. 가라인의 해외 이동 332
7. 가야금과 악사 우륵 334
8. 결론 - 남쪽으로 이동과 그 흥망의 자취 336
9장. 부여조선에 대한 고찰
- 부여조선의 역사적 규명 338
1. 부여의 역사적 위치 339
2. 부여국과 고숙신성(古肅愼城) 342
1) 부여국과 종족 분파 346
2) 숙신과 조선이란 단어의 의미 검토 349
3. 부여조선과 관련 문헌 351
4. 단군조선과 관련 문헌 356
1) 단군은 천왕이다 356
2) 단군은 신왕(神王)이며 명왕(明王) 360
5. 단군조선의 사회사적 의미 363
6. 큰 임금으로서의 왕검과 관련 문헌 368
7. 부여국의 사회 형태 - 관직 제도를 중심으로 376
8. 위구태, 해부루와 단군이라는 호칭 388
9. 기자가 단군을 대신하였다는 설에 대한 논증 396
10. 결론 - 단군의 다양한 모습 400
10장. ?, ?, ?어 원칙과 순환 공식 408
1. ‘뷔’의 철학적 이치와 태백(太白)의 진정한 도(道) 409
2. 일리만상(一理萬相)의 원칙 412
1) 신앙과 관련된 어휘상의 공식 412
2) 국명, 종족명에 나타난 공식 414
3) 산악, 하천 어휘에 나타나는 공식 419
4) 관직명에 나타난 원칙 423
5) 옛 지명에 나타난 원칙 424
6) 기타 문헌에 나타난 원칙 432
11장. 고구려와 평양에 대한 고찰 436
1. 고구려와 평양의 관련성 438
2. 졸본부여는 첫 번째 평양 440
3. 비류부와 위나평양(尉那平壤) 445
1) 비류부는 중앙부이다 446
2) 강가의 수도인 위나평양(尉那平壤) 449
4. 위나평양에 대한 여러 가지 설 454
5. 위나평양과 환도성 459
1) 환도의 의미와 천도 이유 461
2) 진수(陳壽)의 〈위지〉의 허구성 463
6. 위나평양과 관련 문헌 자료 468
7. 평양과 동황성(東黃城), 황성(皇城) 475
8. 환도, 평양, 황성(皇城)으로 이름이 변한 이유 483
9. 고국원왕과 하평양(下平壤) 489
10. 장수왕의 서경평양 500
11. 결론 - 고구려 천도 약사 508
12. 부기 513
12장. 백제사에 대한 총체적 고찰 515
1. 서론 515
2. 백제의 의미와 건국 516
1) 백제도 부여국 517
2) 백제는 백악군(白岳君) 519
3) 백잔국(百殘國)과 과잔국(科殘國) 520
4) 백제평양(百濟平壤)과 변한 523
5) 부아악과 백제산 526
6) 온조명왕(溫祚明王)과 위례성 529
7) 위례성과 어라하(於羅瑕) 532
3. 백제 왕실의 혈통 535
1) 백제왕실은 동명왕의 후손 535
2) 소서노 왕후와 연타발왕 538
4. 역대 수도 및 오방성 542
1) 위례성과 고사부리 547
2) 웅진 사비와 오방성(五方城) 552
5. 주류성과 우금암산성(禹金巖山城) 568
1) 주류성과 변산성(邊山城) 568
2) 우금암(禹金巖)과 우금바위 570
6. 백강, 웅진강, 기벌포 572
1) 탄현과 백제와 신라의 중요한 길 575
2) 백강과 기벌포 578
3) 웅진 입구와 백강 입구 582
7. 거발성과 계화현(界火縣) 590
8. 백강구 전쟁에 대한 평가 593
9. 담로(?魯)와 담모라담모(聃牟羅聃牟) 598
10. 제도와 법속 601
11. 요서와 진평(晋平)에 백제가 있었다는 근거 605
13장. 조선의 고대 지리문화에 대한 고찰 614
1. 지명 기원의 문화적 가치 615
2. 성(城), 현(峴), 산(山), 암(巖)이 호용된 예 619
3. 산(山), 수(水), 월(月), 평(平) 등이 호용된 예 624
4. 양(楊), 안(安), 벽(碧), 백(白), 풍(豊), 술(述) 등이 630
호용된 예 630
5. 장(長), 상(上), 왕(王), 대(大), 고(高)가 호용된 예 642
6. 부루(夫婁), 불(不), 비류(沸流), 비(比), 비(非) 등이 647
호용된 예 647
7. 아사달(阿斯達) 이래의 지명문화 658
8. 지명이 변한 이유 665
역자 후기 678
《조선상고사감》에 자주 인용된 문헌들 688
민세연보 689
찾아보기 691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독립운동가, 국학자, 민족사학자, 언론인, 정치인.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
1891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하였고, 1907년 서울 황성기독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으며, 1910년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에 입학하였다. 1913년 상해, 북경 등 중국을 여행하였고, 신규식 선생 주도하의 독립혁명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으며, 1914년 일본 조도전(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7년 민족종교이자 당시 독립지사들의 구심점이었던 나철 선생의 대종교(大倧敎)에 입교(入敎)하였으며, 1919년 11월 비밀항일결사인 청년외교단 활동으로 일경에 검거되었다. 이후 1943년까지 독립운동으로 9차례 투옥되며, 도합 7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르었다.
1924년 〈조선일보〉 주필 겸 이사로 입사하였고, 이후 발행인, 편집인,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 총무로 선임 1930년 백두산에 오르고 〈백두산등척기〉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여순 감옥에 수감 중이던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론을 〈조선일보〉에 연재시켰다. 또한 1934년 단군 유적지인 구월산을 답사한 후 〈구월산등람지〉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위당 정인보와 함께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4년 여에 걸쳐 교열·간행하였다.
1946년 1월 상해임시정부 주도하의 ‘비상국민회의’ 주비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47년 2월 미군정 민정장관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9월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어 1965년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9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저서로는 《백두산등척기》(1931), 《조선상고사감》(1947~1948),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1945), 《한민족의 기본진로》(1949), 《민세안재홍선집》(1981) 등이 있다.

역자 : 김인희
중국 북경중앙민족대학에서 언어인류학을 공부했으며, 한장어(漢藏語)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마학량(馬學良) 교수의 지도를 받아 쓴 논문 〈한국과 먀오족의 창세신화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자의 학문적 관심은 한국 고대사에서 시작되었는데, 공부를 계속하면서 고고학과 인류학이 상보적이며 학문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고고학 쪽으로는 동이 문화를, 인류학 쪽으로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먀오족
과 야오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동이신화 태양을 쏘다》(2007, 박이정), 《소호씨 이야기-산둥 대문구 동이족의 탐색과 발견》(2009, 물레),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유민》(2010, 푸른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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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의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우리 고대사에 널리 쓰였던 우리 말들의 원형과 그 속에 깃들인 고대사의 실상을 70종이 넘는 한국과 중국의 사서 및 고문헌들을 정밀히 분석하여 밝혀낸 항일투사이자 언론인 안재홍선생의 역저를 발간 67년만에 현대어로 풀어내다!


민세 안재홍 선생은 1891년 12월 30일 지금의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65년 3월 1일 75세로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과 함께하였는데 조선시대 말의 국권침탈의 과정과 일제에 의한 합방, 광복, 한국전쟁, 분단이라는 한국사에서 가장 고단한 시간을 거쳐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은 한 분야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임을 다하려 하였다. 일반적으로 민족운동가, 언론인, 역사가, 정치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삶의 총체적인 목적은 민족의 독립이었다. 초기에는 〈조선일보〉의 편집인 또는 사장으로 언론인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정치활동이 불가능해진 1930년대 이후부터는 역사와 관련된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조선상고사감》 〈권두에 씀〉에는 정치적 투쟁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역사 연구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밝혀져 있다.

“내가 영어(囹圄: 감옥)에서 생각하니 정치로써 투쟁하는 것은 한동안 거의 절망적인 상황으로 국사를 깊이 연구하여 민족정기를 영원히 남겨 두는 것이 스스로의 지고한 사명임을 깨달았다.”

해방 후에는 신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민정장관에 취임하였고 한국전쟁 시 납북되어 북한에서 평화통일추진협의회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민세 선생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깊은 책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조선인은 인생으로서, 조선인으로서, 이중 삼중의 고통으로 싸여 있다. 우리가 인생인 고로 받는 고통 외에, 조선인인 까닭으로 받는바 고통이 말할 수 없도록 많다. …… 우리는 제국주의의 번민을 말하였고, 세계의 고민을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 자체의 번민고통은 또 어떻게 하랴. 그러나 이것이 타고난 인생의 운명이요, 또 우리의 운명이라면, 우리는 홀로 또 어찌하랴. 회피해서는 안 되겠고, 또 회피할 길도 없다면 그는 또 어찌하랴. 오호(嗚呼), 오인(吾人)은 범인이로다. 무엇으로써 천하의 동포에게 제창하랴. 그러나 다만 이 한 말, ‘위험한 속에서 살라.’ 고통을 그대로 사랑하자.”

민세의 삶은 그야말로 위험 속의 삶이었으며 한 개인으로 보아 고통의 삶이었다. 선생은 고통의 삶을 스스로 살고자 자처하면서도 어떠한 보상도 원하지 않았다.

“100년 이후의 나의 존재나, 또는 그의 어줍지 않은 영화나 부귀를 알아줄 자 몇 사람이랴. 1,000년 후에 이른바 그 공명과 권력을 알아줄 자 누구이냐. 다같이 초로인생으로 돌아가고 만다 할진대, 한번 부앙천지(俯仰天地)에 거침이 없이, 그의 혈관 속에서 뛰어오르는 대로, 그의 오장 속에서 끓어오르는 대로, 남이 알거나 모르거나, 후세에 전하거나 못 전하거나 이 거룩한 전투의 일병졸이 되자.”

후세인들이 자신을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은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한 사람의 병사로서 역할을 다하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이 다짐이나 구호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의 실체를 밝히고 민족독립의 정당성을 이론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역사서를 집필하게 되고 그 이론적 틀이라 할 수 있는 민세주의(民世主義)를 주장한다. 1934년 조선학운동을 시작하면서 “민족으로 세계에 - 세계로 민족에 교호(交互)되고 조제(調劑)되는 일종의 민세주의를 형성”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민족주의(민족애)와 세계주의(인류대동의 이념, 인류애)를 통합하여 ‘민족적 국제주의’, ‘국제적 민족주의’를 형성하려는 이념이었다.”

《조선상고사감》이 주로 1937에서 1941년에 걸치는 시기에 집필된 것으로 보아 《조선상고사감》의 집필은 민세주의를 이론화하는 과정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선생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민족의 통사를 집필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것이었다. 《조선상고사감》 〈권두에 씀〉에는 선생이 직접 《조선상고사감》을 저술하게 된 이유가 밝혀져 있다.

“조선은 건국한 지 벌써 40수(數)세기가 되었으니 세계에서 몇 번째 안 가는 문화고국(古國)인 것은 틀림없으나 아직도 완전한 역사서를 갖지 못하고 있다. 삼국 이전은 문헌조차 갖추지 못하였거니와 있는 문헌도 국가의 역사로서 체통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석의 갈피를 잡을 수 없으니 국민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이를 정리하고 안배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점은 해박한 연구를 통해 엄정하게 밝혀내야 한다. 하물며 단군 이래 삼국통일 시기에 이르는 시기 거의 삼천 몇백 년 사이 역사에 나타나는 정치적, 법제적, 문화적인 여러 안건과 민족흥망과 관련 깊은 역사적 사실은 어느 것 하나 아직까지 전모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어 아직도 암중모색의 상태이다. 우리의 역사가 반만 년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만큼 문화를 총결산하여 완벽한 조선통사를 써서 새로운 시대의 창성(昌盛)을 위한 정신적 근간을 만들 필요가 있음이 요청된다.”

1930년대 당시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완벽한 역사서를 갖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러한 필요에 의해 선생은 직접 《조선상고사감》을 집필하였다. 《조선상고사감》은 비록 세계 발전의 과정으로서 한국사를 인식한 부분이 있으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쓰인 책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사회주의 사상을 일부 수용하고 좌우가 공존하는 신민족주의 건설론을 만들어 냈다고 하지만 〈아아, 그러나 그대는 조선사람이다〉의 내용을 보면 그가 순수한 민족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오인은 무슨 주의자로 나기 전에 먼저 사람으로 났다. 오인은 조선인으로 나기 전에 먼저 사람으로 났다. 그런 고로 이론상 오인은 먼저 사람다운 짓으로 사람답게 잘 살아보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무슨 주의자라는 특수한 경향을 갖게 되는 것은, 우상하에 굴복하는 미신가와 같이, 주의 그것에 맹목적으로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오인은 먼저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왔겠지마는, 와서 보니 어찌할 수 없는 조선 사람이었다. 그는 단군의 자손을 말할 것까지도 없고, 언어와 풍속을 끌어낼 필요도 없이, 넓은 세계 16억의 인총(人叢) 중에 누구나 저희의 생존과 행복과 명예보다 조선 사람의 그것을 존중할, 또 대행할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고로 오인은 동일한 대우주의 아이들로서, 만민평화의 고원한 인류애를 동경하고 추구하여야 하겠지마는, 결국은 남의 일은 남에게 맡기고 당장에 이해체척(利害體戚)을 같이 하는 조선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할 밖에 없는 것이다.”

그동안 《조선상고사감》은 자의적인 언어학적 해석으로 인한 고증면에서의 문제점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관념론적인 해석에 머물렀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 반면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의 변화가 고조선 사회의 발전단계였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그 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조선상고사감》의 내용으로 보아 선생은 세계 각지 원시민족 관련 인류학 자료, 한국·중국·일본의 고문헌과 언어학 자료를 이용하여 본서를 작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고문헌에 전하는 단편적인 자료만을 가지고 고대사를 집필한다는 것은 암중모색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선생이 택한 방법론은 역사사회학적 방법과 인류학적 방법, 언어민속학적 방법이었다.

본래 선생은 일본 조도전대학(早?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한 사회과학도였다. 그는 고대사의 이해에 사회과학적 지식이 필요함을 역설하였으며,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만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역사가였다. 역사사회학적 입장에서 아사달에 건립된 최초의 모계사회, 즉 원시적인 수렵경제시대로부터 부계 중심의 목축경제시대를 거쳐 근대와 같은 형태의 봉건식 귀족국가가 성립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고대사를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닌 사회경제발전의 산물이며 정치체제의 고도화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고조선, 부여조선, 삼한, 삼국시대의 사회상을 밝히려 노력하였다. 《조선상고사감》에는 ‘사회사’라는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기’를 중심으로 본 사회발전사 요약’, ‘단군조선의 사회사적 의미’, ‘신라 관직에 대한 고찰 - 관직을 통해 본 사회사의 한 측면’ 등이 있다. 인류학적 방법으로는 세계 원시민족의 예를 들어 한국 고대사회의 양상을 파악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제2장에서

“이로코이인의 입법회의 관련 신화, 인도의 비로자나불, 고대 함(Ham)족이나 셈족 계통의 태양숭배, 이집트의 파라오(Pharaoh) 등이 진방(震方: 우리나라)의 언어와 습속에서도 이와 유사한데 특징이 매우 뚜렷한 점이 있다. ‘?달’, ‘?어달’, ‘?땋’ 또는 ‘?어’들은 ‘최초의 복지를 잉태한 평야’라는 뜻으로 고대 사회에서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원생지(原生地) 또는 원생산(原生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는 억측이 아니다.”

고 하였다. 그중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책은 루이스 모건(Lewis Henry Morgan)의 《고대 사회》로 이 책에서 원생지 개념을 차용하였다. 역사사회학적 방법론을 통해 고대사회발전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인류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원시사회의 양상을 파악하였다면 언어민속학적 방법론은 주로 고대 사회의 구체적인 양상을 파악하는 데 활용하였다. “언어민속 자료와 국내외 문헌 자료를 이용하여 이 모든 가설을 고증하고자 한다.”라고 스스로 밝혔듯이 고문헌상의 지명, 국명, 종족명, 관직명, 인명, 법속, 민속 등을 언어학적 방법으로 해석하려 하였다. 제13장에서

“지명에 대한 비교연구는 자못 번잡하고 난해한 감이 있으나 일맥상통한 기(氣)가 그 사이에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간의 의미를 밝혀낼 수 있다.”

라고 하였는데 ‘기, 지, 치를 이용해 고대 관직명을 해석’하기도 하고 ‘?, ?, ?어 원칙과 순환 공식’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학적 연구는 자의적 해석으로 인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는데 제1장에서 스스로 “기, 지, 치에 대한 주장을 발표하자 세간의 웃음거리가 된 바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상고사감》을 통하여 선생이 목적한 것은 고대사의 전체적인 체계를 세우는 것으로 크게 두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한민족의 활동영역을 중국 동북지역으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으로 확정하였다. 본문에 진역(震域), 진방(震方)이라는 용어가 자주 보이는데 이 용어가 포괄하는 지역은 현재의 지리적 개념으로 볼 때 중국 동북부지역과 한반도를 아우르는 지역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 삼한, 삼국이 활동한 지역을 말한다. 중국 동북부지역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한민족의 활동영역으로 확정하였다.
둘째, 한민족은 고조선 이래 하나의 통일된 정치공동체였으며 문화공동체였음을 주장하였다. 제5장에서 “상술한 여러 항목과 〈신라 관직에 대한 고찰〉에서 말한 내용에 의하여 상대 진인(震人)의 언어와 혈통 등 정치문화적 특징과 전통이 북쪽의 송화강 유역의 곡창지대와 요하 유역으로부터 남쪽의 바다 연안과 섬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동일한 체계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8장에서는 “이로써 고대 북방계 종족의 언어와 법속이 서로 통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더구나 진방(震方) 전체 동서남북이 완전히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즉,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은 고대 한민족의 활동무대로 이 지역은 정치적, 문화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한민족이 진방이라 일컫는 구체적인 지역에 민족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이론이 ‘?, ?, ?어 원칙과 순환 공식’이다. 선생은 ‘?’, ‘?’, ‘?’가 진방사회의 고대 문화의 총화라고 결론 짓고 사회발전과 함께 ‘?’, ‘?’, ‘?’와 같은 언어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이들 언어는 이후 한민족의 지명, 족명, 국명, 인명에 다양하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ㅂㆍㄺ’은 광명을, ‘불’은 행위를, ‘?’는 잉태라는 의미이며, 이로부터 ‘?달’, ‘?어달’, ‘?땅’과 같은 지명이 등장하였는데, 이들 단어는 ‘최초의 복지를 잉태한 평야’라는 뜻이다. 이후의 백악(白岳), 백아(百牙), 부아(負兒), 평양, 부여, 비류, 패(浿) 등이 모두 ‘?어’라는 의미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다양한 지명에 등장한다고 한다.
현대 학문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상고사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미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된 자의적 해석, 관념론적인 결론 외에도 논리적 비약과 같은 문제점도 발견된다. 이러한 점들은 본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살았던 시기와 현대사회가 변하지 않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민족과 국제화’의 문제이다. 당시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을 하였다면 현재는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가 대립을 하고 있다. 역사는 흘렀지만 어쩌면 흐르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한국사회를 바라보던 선생의 고뇌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느끼면서 본서가 독자들이 근현대사를 새롭게 이해하고 현재의 역사학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역자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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