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습니다. 구름은 노아 이후에도 그치지 않는 인간의 죄와 허물, 그로 인해 겪어야 할 고난과 역경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구름 속에 무지개가 보인다는 것은 구름을 통과하는 햇빛이 있음을 말합니다. 구름이 햇빛을 만나 합력하여 동행하니 무지개가 나옵니다. 홍수 이후에도 세상은 흠이 많겠지만, 그럴수록 은혜가 더욱 파고들 거라는 약속의 징표가 ‘무지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어 주시려고 우리 머리 위로 온갖 구름을 모으십니다. 바울은 이 고난의 신비를 알아차리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고 보면 너에게 좋았던 그래서 내게도 좋았던, 무엇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공동선의 모든 순간은 구름 한 점 없이 찬란하고 눈부신 날이 아니라, 오히려 구름이 잔뜩 드리운 우리의 잿빛 일상에 찾아온 고마운 손님 같습니다.
--- 「1.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중에서
성경은 들여다볼수록 ‘나와 너’의 관계의 세계와 ‘나와 그것’의 경험의 세계의 끝없는 대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경험 세계의 극치인 도시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일생 관계의 세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영원한 ‘너’이신 하나님의 옷자락을 바라보기도 하고 나부낌을 듣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때로 바로나 아비멜렉 등 상대를 ‘그대’가 아닌 ‘그것’으로 대하는 연약함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을 ‘그대’로 만나는 나름의 사연을 좇아 영원한 ‘그대’이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반면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잠시 관계의 세계에 머물다가, 그만 상대를 ‘그것’으로 간주하는 경험의 세계로 훌쩍 떠나고 맙니다. 그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은, 관계의 세계를 떠나버린 나는 아무리 다채로운 인생 경험을 하더라도 결국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나다운 나’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영적 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라가 아들이 없는 상실에 웃음을 잃은 것은 그가 여전히 경험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와 롯을 그들이 갇힌 경험의 세계에서 구원하시고, 참된 관계의 세계로 들어서도록 역사하십니다. 성경의 구원 역사는 하나님이 인류를 경험의 세계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로 이끄시는 역사며, 그 관계에 근거하여 이웃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과정입니다.
--- 「4.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중에서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가장 경멸하는 인간을 향한 나의 용서보다 한 치도 더 자라지 못하는 법입니다. “모든 인간은 온전해지기 위해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용서라는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 랭던 길키(Langdon Gilkey)의 조언을 되새기지 않아도 될 만큼 거뜬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바리새인들보다 하나님께 가깝다는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죄인이 의인보다 큰 사랑을 갖고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죄인이 더 큰 사랑을 하는 더 큰 존재가 된 까닭은 더 많이 용서를 받았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이 말씀은 많은 죄를 용서받은 죄인들의 남은 날에 해당되는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베르 경감처럼 사랑이 부족한 왜소한 의인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리엘 주교가 놓은 용서라는 다리로 지나간 장발장처럼 사랑이 넉넉한 죄인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 아닐까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심령이 가련한 모든 이(Les Miserables)를 환대하는 하나님 나라의 과분하고도 ‘새로운 기준’(New Normal)으로 공포(公布)되었기 때문입니다.
--- 「6. 어메이징 그레이스」 중에서
중세 교회의 각종 성화(聖畵)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각자 자기 일을 따로 하는 장면은 없습니다. 아마도 스승과 제자였을 두 장인은 출애굽기 31:1-11에 열거된 모든 일을 서로 존중하며 동역합니다. 분명히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각자 전공에 탁월한 전문가였습니다. 하지만 일을 나누어 각자 일하는 개인주의적 방식 대신, 상대의 일에 기꺼이 조력하는 공동체적 방식을 따랐습니다. 성막 제작은 본질상 개인주의적 분업화, 전문화의 결과일 수 없었고, 공동체적 협력과 연대의 결과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적절히 훈련된 조수들과 함께 성막 건축과 관련된 모든 숙련 노동을 책임졌습니다. 자신의 전문 지식을 움켜쥐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전수했습니다(출 35:34). 한마디로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일터에서는 노동소외나 인간소외가 생길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일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재주’는 선천적 능력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부어 주시는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재구성된 달란트를 의미합니다. 성령에 감싸인 사람들이 모인 노동 현장에서는 노동과 사람에게서 소외될 염려가 없습니다.
--- 「9. 니글의 이파리」 중에서
주님은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거치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잇고, 영원과 시간 사이를 잇는 유일무이한 ‘중재자’(mediator)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이자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하나님과 연합되게 하는 데 아무 제한이 없으시다면, 하물며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아 서로 하나 되게 하는 데 무슨 걸림이 있으실까요. 예수는 어떤 종류의 사이라도 중재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 사이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좋게 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만드는 ‘인터페이스’(interface) 역할을 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얼굴 안에서만 그리고 예수의 얼굴을 통해서만 모두 자기의 얼굴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성과 갈릴리라는 주변성 사이에서 공생애를 살아 내며 온 세상을 향해 개방된 하나님 나라를 여는 새 창조의 선구자가 되신 그리스도는 한계와 경계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길과 진리와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 「13. 비아 메디아」 중에서
칼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고 심지어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사건을 ‘하나님의 적응’(divine accommodation)이라 명명했습니다. 야생 여우와 같은 인간에게 성자 하나님이 어린 왕자와 같은 모습으로 찾아와 계속 맞추어 가시며 마침내 은혜로 길들여진 우리와 미소를 교환하며 손가락을 거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자유에 선행(先行)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여, 인간을 진정 인간 되게 하시고 공동체를 진정 공동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은혜를 전제합니다. 하나님이 취하시는 은혜의 행동은 인간의 인격을 제거하지 않고 회복합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진정 유익하게 합니다. 이 비밀을 알았던 C. S. 루이스는 선언합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나만의 진정한 인격을 갖기 시작하는 때는 바로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때, 돌아서서 그의 인격에 나 자신을 바칠 때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 나라에서 약속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한 것 같아도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로 모두에게 이루어진 영원한 신비입니다.
--- 「14. 꽃들에게 희망을」 중에서
성경은 우리를 ‘인격화시키는 인격’이신 그리스도의 인격이 없이는 우리의 비인격성과 비인간성을 해결할 길이 없음을 솔직한 사실주의 문체로 기술합니다. 그러기에 신학자 김학봉은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인격 안에서 우리의 인성을 인격화시켰으며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그 자신의 인격과 연합되게 한다”고 말합니다. 역사학자이자 교회사가인 앨런 크라이더(Alan Kreider)의 연구도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 초기 기독교의 ‘희한한 성장’이 그리스도인들의 남다른 성품, 태도, 행동으로 형성된 친척, 이웃, 동료와의 “정서적인 유대”에 기인했음을 밝혀냅니다. 한 예로, “자기 아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을 본 남편은 “하나님을 위한 후보자”가 되어 갔습니다. 초기 교회의 “외부인들은 그들의 삶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교리 교육은 세련된 사상이 아니라 ‘성품’과 ‘덕스러운 삶’을 낳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초기 교회의 성장이 그리스도인들의 설득력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삶의 방식의 열매였다고 술회합니다.
--- 「16. 인격의 발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