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는 근본적으로 그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웬 모순씩이나? 아마 대부분의 편집자들은 자신이 모순된 존재라는, 모순된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편집자들은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한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란 것을 대부분 모르면서, 또는 가끔은 알면서 ‘그냥 그 일을 한다’. (…) 이처럼 편집자는 모순된 자리에 있다. 때로는 피할 수 있다 해도, 건축에 관한 책도 다루고 인공지능에 관한 책도 다루고 나긋나긋한 에세이도 다루어야 한다. 다룰 수 있는 것보다 다룰 수 없는 것을 다룰 때가 많다. ‘그래서’ 엉터리 책이 나오고, ‘그렇지만’ 좋은 책이 나온다. 이러한 모순된 존재로서 편집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첫째 ‘최초의 독자로서 생생하게 읽는’ 자신의 체험을 갖고 이를 반영하는 것, 둘째 자신을 믿지 말고 언제나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 p.17,29, 「편집자라는 모순된 자리에서」 중에서
편집자는 일선에서 최초로 원고를 접한다. 투고 원고나 청탁 원고 외에 사장이나 편집장을 거쳐 들어오는 것들도 있다. 어쨌든 편집자는 출판사의 일선에서 그 원고를 최초로 읽게 될 가능성이 높다. 편집자가 ‘이건 아니다’ 할 경우 그 원고는 선택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영역별로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판단하는 시스템을 제대로 갖춘 출판사도 있다. 그렇다 해도 편집자가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원고가 선택되기는 쉽지 않다. (…) 편집자가 다루는 것은 원고(原稿)다. ‘원(原)’은 근원이요 시초를 뜻한다. 근원이 되는 글, 시초가 되는 글이 완성된 글로 책에 담겨 독자 손에 닿을 수 있도록 편집자는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이 원고는 도저히 안 되겠어!” “저 저자에게 이런 내용의 원고를 받아 꼭 책을 내겠어!” 이와 같이 원고의 사활을 결정하기도 하고, 같은 원고로도 편집자에 따라 아주 다른 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
--- p.38,40, 「편집자, 보이지 않는 권력」 중에서
편집자는 늘 완성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자신이 원하는 책을 담당했든, 위에서 떨어져 내려왔든 자기가 지금 그 책을 담당할 최상의 상태에 와 있지 않다. 심지어는 최악일 때조차 있다. 어쨌든 책을 맡았으면 그 순간부터 그 책을 제대로 편집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챙겨야 한다. 심리적으로도 맡은 책의 분야와 분위기, 정서에 적응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책이 됐든 필요한 소양과 적응력은 훨씬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겉보기만 번지르르한 책을 만들 수밖에 없다. 오늘 보는 뉴스 한 줄, EBS 다큐멘터리 한 편, 광화문 광장의 촛불 시위에 나가 외친 경험, 몽골 초원에서 본 별빛, 서점 진열대에서 만난 책의 제목…… 그 모든 것이 편집자에게는 자산이다. 그것들을 흘려버리지 말고 맥을 짚고 마음으로 즐기고 뱃속으로 삼켜야 한다. 그런 습관, 집착증이야말로 편집자라면 걸려야 할 편집증(編輯症)이다.
--- p.51-52, 「편집자와 편집증」 중에서
내가 출판사에 입사한 1980년대 중반에는 일반 단행본 출판은 거의 모두가 활판 인쇄였다. 출판 편집자들은 자신들을 가리켜서 ‘교정쟁이’라고 자조적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교정지에 코를 박고 빨간 볼펜으로 교정을 보는 데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교정쟁이’의 유일한 무기이자 도구는 ‘빨간 볼펜’이었으니, 여름에는 흰 남방셔츠에 새빨간 ‘볼펜 똥’이 묻어 있기 일쑤였다. (…) 여러 가지 교정부호 중 이 ‘돼지 꼬리 둘’을 시원스럽게 휘날려 그려 넣을 때만큼은 기분이 상쾌하고, 스트레스까지 날아가는 것 같다. ‘돼지꼬리 하나’는 글자가 물구나무를 섰거나 옆으로 누워 있으면 똑바로 세워놓으라는 지시로 그려넣는다. 그런데 요즘 21세기의 편집자들은 이 ‘돼지 꼬리 하나’ 부호는 사용하지 않는다. 아마 1990년대 이후 출판사에 입사한 세대는 이런 교정 부호가 있다는 것조차 모를 수 있다.
--- p.57-59, 「활판과 함께 사라진 ‘돼지 꼬리 하나’」 중에서
따옴표로 구별해주는 대화문을 또다시 한 자씩 더 들여넣어 지문과 구별해줄 필요는 없다. 새로 행을 잡아 쓸 때는 한 글자 간격(그 글에서 택한 간격)만큼 들여넣고 글자면 글자, 따옴표 등 부호면 부호로 시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글쓰기이고 표기법이다. 만약 교과서 편찬 지침에 대화 표기·편집에 대한 규정이 있다면 교육부와 관련 인사들은 그 규정의 타당성을 열린 자세로 재검토하기 바란다. 잘못된 편집방식은 지켜야 할 전통이 아니다. 교과서가 먼저 바뀌면 교과서를 답습해온 출판사들도 바뀌게 된다. 이치에 맞지 않고 글의 원형을 손상할 위험이 있는 교과서의 대화 편집방식을 하루빨리 점검하여 합리적으로 바꿔야겠다.
--- p.145, 「교과서 대화 편집방식 바꿔야 한다」 중에서
우리말을 바르게 잘 쓰자고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난의 제목이 왜 하필 ‘우리말 클리닉’일까?(…) 우리말 ‘바로 쓰기’나 ‘길라잡이’, ‘다듬기’, ‘가꾸기’ 같은 제목이라야 내용과 포장이 딱 들어맞는 것 아니겠는가. (…) 그렇지만 나는 누구나 쓸 법한 ‘우리말 가꾸기’ 같은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우리말’에 대한 자의식을 쏙 빼고, 그냥 저잣거리의 감각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오히려 우리말 ‘클리닉’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 우리말 사랑이 불꽃처럼 뜨거운 분들의 주장을 읽다 보면, 어떤 내용은 우리말 순수주의나 순결성에 너무 매여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말도, 삶도 순종(純種)은 없다. 우리 몸이 외부세계와 교섭하는 것이 바로 육체적 생존이듯이, 말도 그 본질은 다른 언어와 끊임없이 교섭하면서 생성되고 발전하는 것이다. (…) 소통이면 소통, 절규면 절규, 탐구면 탐구인 대로, 말함으로써 한층 자유로워져야지, 말을 잘 가꾸자는 노릇이 되레 말의 굴레를 쓰고 끙끙대게 만드는 구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
--- p.168-170, 「우리말 클리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