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호메로스의 서사시, 성경, 영미 문학을 공부하면서 그리스 문명과 종교혁명의 역사적 맥락을 확실하게 잡고 싶어질수록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대부분의 학술서가 마치 사자死者의 흐릿한 모습만 안겨주는 고별식의 추도문인 양 쓰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교과서에 담기는 순간 ‘죽은 역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 p.4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에서 마녀 혐의를 받아 극형에 처해진 사람이 8만 명이나 되었다는 것, ‘몸무게 달기’로 마녀를 판별한 이유가 당시 유럽인은 마녀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영혼만큼 몸무게가 줄었고, 체중이 정상인보다 적게 나가기 때문에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당시에 마녀의 저울로 마녀인지 아닌지를 감정했다는 것, 그러니 요즘 시대의 너무 마른 여성은 그 시절에 태어났으면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 p.5~6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술·담배도 안 하고 심지어 채식주의자였다. 그런데 그가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강제 수용소를 설치해 민간인 100만여 명을 학살할 때는 역사상 그 누구보다 통제 불능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걸핏하면 밤새워 폭음을 즐기며 온종일 시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가장 암울하던 시기에 영원히 타협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며 영국을 빛으로 이끌었다.
--- p.12~13
20세기에 들어 마녀사냥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마녀로 고소당한 이들은 대개 고아나 과부처럼 혈혈단신이거나 가난하며 소외된 주변인이었다. 통계를 보면 ‘마녀’로 고소당한 사람들 중 대다수가 중년과 노년층이었는데, 50세 이상이 전체 피고소인의 절반 이상이었다. 피고소인 중 75퍼센트가 넘는 사람이 마녀 판결을 받았고, 과부와 미혼 여성의 비율이 기혼 여성보다 높았으며 대체로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 p.28~29
그래서일까. 마녀재판 사례의 대다수는 지금의 독일, 스위스, 프랑스 동북부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들 지역은 종교개혁의 파도가 가장 용솟음친 진앙지였다(잘 알려졌다시피 마르틴 루터는 지금의 독일 지역에서, 프랑스 북부에서 태어난 장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 일대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가장 많은 괴물을 잡아 내가 바로 제일 믿음직한 전사라는 걸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가장 많은 마녀를 사로잡아 내가 바로 제일 믿을 수 있는 교파라는 걸 알려줄 것이다.’ 괴물이 끔찍한지 아닌지, 마녀가 죽어야 하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 p.32
포르투갈이 이토록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건 한 왕자의 공이 크다. 정작 본인은 거의 바다에 나가지 않았음에도 ‘항해왕’이라고 불린 그 왕자는 ‘바다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 바다가 도와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곧 엔히크 왕자Infante D. Henrique다.
--- p.52~53
포르투갈 왕실의 후원을 얻어내지 못해 의기소침해 있던 콜럼버스에게 어수룩한 스페인이 걸려들었다. 콜럼버스는 확실히 행운아였다. 본래 그는 유럽에서 출발해 5,000킬로미터도 안 되게 항행하면 아시아에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쪽으로 2만 5,000킬로미터 이상 꾸준히 항해해야 아시아의 변두리에라도 닿을 수 있었다. 중간에 아메리카 대륙이 끼어 있지 않았다면 콜럼버스와 그의 동료는 진즉 배에서 남은 생을 마감해야 했을 것이다. 포르투갈은 바다에 빠삭했기 때문에 콜럼버스를 놓쳤고, 스페인은 바다를 잘 몰랐던 덕에 오히려 ‘신대륙’을 얻었다.
--- p.59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삼권 분립 원칙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입법, 행정, 사법으로 권력을 분리하면 정치제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 한 사람이나 한 단체가 세 권력을 동시에 손에 쥔다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삼권분립을 실시하는 미국은 지금까지도 당파 싸움, 내부 불협화음으로 인한 내적 소모, 이익단체가 입법과 행정을 마음대로 흔드는 폐단과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중화민국의 국부國父 쑨중산孫中山은 삼권분립으로는 부족하고 오권분립(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감찰권, 고시권)이어야 기능에 따른 권력 구분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 p.77
악취도 악취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할 정도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것도 문제였다. 수많은 공장에서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대여섯 살 정도 되는 어린 노동자까지 고용했다. 그들은 어릴때부터 매일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저녁 8~9시가 되어서야 퇴근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중노동에 시달린 수많은 노동자들은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하며 인생의 절망과 고민을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와트의 고향이자 공업도시인 글래스고에는 1830년에 집 20채마다 술집이 하나씩 있었고, 1840년에 이르러서는 집 10채마다 술집 하나가 있었다. 이토록 밀도 높게 술집이 밀집해 있다는 것은,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키기 위해 알코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 p.92~93
미국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있잖아! 오늘 저녁으로 뭐 시킬래?” 요즘 음식 배달 업체도 당시 미국의 ‘공중 배달 서비스’ 앞에서는 맥을 못 출 것이다. 봉쇄 후 5일째 되는 6월 29일부터 미국은 놀라운 ‘공중 택배 시스템’을 가동했다. 미국이 보낸 항공기는 250만 베를린 주민에게 식량과 각종 생필품을 대규모로 공수하며 1년 동안 총 27만 7,728회 비행했다. 서베를린이 봉쇄된 11개월 동안 매일 평균 5분 이내로 항공기가 한 대씩 배달하러 온 것이다. 석탄, 옷, 음식, 문구, 약품 등 물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탕, 초콜릿, 심지어 생일 케이크도 공중에서 투하하는 데 전혀 문제 없었다.
--- p.121~122
유럽 대륙과 관계가 뜸해진 후 영국은 한껏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끝없는 바다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해외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전념하면서 전 세계를 주름잡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것이다. 백년전쟁 이후 영국은 해양국가로서의 발전 모델을 확립하고 ‘자랑스러운 아웃사이더’로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외교 철학을 내세웠다.
--- p.137
세계대전 당시에는 어떻게든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은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을 위한 조약에 서명했다. 석탄과 철강 등 군사 및 공업 물자 공동 관리를 목표로 하는 이 기구가 오늘날 EU의 전신이다.
--- p.144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대성당은 순례길에 오르는 여행객에게 순례자 여권 크레덴시알Credencial을 발급해준다. 수집광이라면 반드시 신청하길 바란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숙소 알베르게, 성당, 시정부 등지에서 스탬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경건하고 신성한 종교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여권은 도보 여행, 자전거나 말을 타고 가는 성지 순례자에게만 해당된다. 여권을 소지하고 성 야고보의 무덤까지 100킬로미터 전부터 온전히 도보로 완주할 수 있다면 ‘콤포스텔라 Compostela’라는 순례 완주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 p.178
1939년 3월 독일은 여세를 몰아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병합해버리고 9월에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히틀러의 끝없는 야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윈스턴 처칠은 체임벌린의 순진함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전쟁과 굴욕 앞에서 당신은 굴욕을 택했지. 그런데 굴욕을 겪고도 당신은 전쟁을 마주해야 할 거야!” 윈스턴 처칠은 “우둔함, 경솔함, 착한 마음씨가 악인을 재무장시켜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고 생각했다. 1940년 체임벌린이 사임하고 윈스턴 처칠이 영국 총리로 취임했다. 윈스턴 처칠의 시대는 이러했다. 우리는 악인에 맞서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 p.221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른 뒤 나치스는 정신질환이나 신체장애로 입원한 독일인 7만 명 가까이를 생존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독가스로 안락사시켰다. 1940년부터 독일군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히틀러의 제국을 확대해나갔다. 이로 인해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에 있던 유대인도 덩달아 화를 입었는데, 매일 수천수만 명이 나치스에게 없애버려야 할 인간으로 낙인찍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 p.241
혹시 고양이가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걸 눈치챘는가? 고양이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며 희열을 느낀다. 이런 심리를 중세 수사들도 알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게르만 지역의 한 수도원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수사가 필사한 원고에 오줌을 싸서 몇 주에 걸쳐 해온 작업을 망쳐버렸다. 수사는 한탄하며 이렇게 적었다. “잃어버린 물건은 없다. 하지만 어느 밤에 고양이가 오줌을 쌌다……. 앞으로 당직을 서는 사람은 고양이가 와서 오줌을 쌀 수 있으니 밤에 책을 펼쳐 놓지 않도록 주의하길 바란다.”
--- p.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