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학원의 바랜 개나리색 차, 그 구질구질한 시트에 앉기만 하면 나는 처음 겪는 세계에 홀로 내던져진 아이처럼 초조해졌다. 원래 가지고 있던 상식적인 생활 감각이 강제로 리셋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액셀을 너무 밟거나 덜 밟았고, 비상등과 깜빡이 켜는 타이밍을 매번 놓치고, 후방주차를 하겠다고 핸들을 바쁘게 돌리면서 후진과 전진을 반복했지만 결국 똑같은 궤적만 몇번이고 왔다 갔다 했다. 기어를 R에 놓는 순간부터는 머릿속이 더 복잡해져서 그랬다. 나는 머릿속에서 차의 이미지를 반전시켰다가 다시 반전시키기를 반복하다 어느 게 원본인지 알수 없는 상태로 액셀을 또, 지나치게 세게 밟고, 주차선 뒤편 화단에 한쪽 뒷바퀴를 걸친 채로 강사한테 혼이 났다.
---「연수」중에서
이찬휘는 앉자마자 A4용지를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방향으로 돌려서 바닥에 내려놓더니 ‘조장’이라고 적힌 빈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선, 조장을 정해야겠는데요?” 그러고는 조원들을 좌로, 우로 한번씩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조장이 하고 싶은 분?” 아마 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때 이미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반질반질한 얼굴 옆으로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붙인 채 스윽 올리면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바로 그애가 조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펀펀 페스티벌」중에서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그애의 집 근처 카페에서 그애를 기다렸다. 천의 얼굴에서 이차를 마치면 내가 늘 택시로 내려주고 손을 흔들던 곳이었다. 너희 집 근처 그 카페야. 이제 퇴사도 했으니까 한번만 툭 터놓고 만나주지 않을래? 기다릴게. 그애가 나타났다. 주책맞게 눈물이 나왔다. 맹세컨대 나는 연애하면서도 이런 추태를 부려본 적이 없었다. 미안…… 내가 같이 잘하고 싶었던 친구들이 다 떠나니까…… 속상해서…… 그냥 이유라도 알고 싶어서…… 혹시 내가 뭘 잘못했는지…… 솔직하게 얘기해줄 수는 없을까…… 그애, 한별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차장님, 저 차장님은 정말 좋았어요. 반대 방향인데도 늘 택시 같이 타고 저 먼저 여기 내려주신 것도 고마웠어요. 차장님…… 저, 전문직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거기서는 미래가 안 보였어요…… 죄송해요. 죄송하긴 뭐가 죄송하니. 네 미래가 될 수 없었던 내가 죄송하지.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자신이 있었다.
---「공모」중에서
“저희 이제는 동네 벗어날 때 되지 않았나요? 다음 라이딩은 아이유고개 한번 가시죠.”
김민우와 서수민이 동시에 물었다.
“아이유고개를요? 벌써요?”
아이유고개란, 로드바이크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구리 암사대교 남단의 특정 구간을 일컫는 말이다. 이 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이 구간을 달리다 보면 가수 아이유의 전매특허인 ‘삼단 고음’처럼 점점 더 급격하고 어려운 업힐이 차례로 세번 이어진다고 해서 ‘아이유고개’라는 별칭이 붙었다. 첫번째와 두번째 업힐을 가까스로 성공한 뒤, ‘악명 높은 것에 비해선 꽤나 할 만한데? 내 실력도 나쁘지 않군’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극악의 마지막 세번째 업힐이 시작되기 때문에 초심자가 한번에 완주하기에 결코 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우리 크루의 경우, 예상컨대 나를 제외한 대부분이 삼단에서 나가떨어질 거라고 확신한다. 그래, 그것도 경험이지. 사이클을 시작했다면 다 겪어봐야지. 안이슬이 걱정되는 듯 물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막상 가보면 할 만하실 거예요. 정 안 되면 내려서 끌고 올라가시면 되죠. 다 경험인데요.”
최도헌이 의욕 넘치는 목소리로 호응했다.
“저도 좋습니다! 아이유고개, 말만 많이 들었는데 드디어 가보네요.”
글쎄다. 네가 과연 오를 수 있을까?
---「라이딩 크루」중에서
그 말, 그 말은 정말로 부드러운 말이었지만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꽁꽁 봉인해두었던 말캉한 주머니를 날카롭게 푹 찌른다. 그 말, 바로 그 말에 나는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그 말, 꿈속의 나는 그 말을 듣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해야 한다. 그래서 울어서는 안 되는 상황인데 꿈 밖의 내가 너무 놀란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난다. 분명 우는데 꿈속에서는 눈물이 한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다행히 그녀는 내가 운 줄 모르고 있다. 마치 방백처럼. 방백 같은 눈물. 그녀는 내가 우는 걸 알아차릴 수 없다. 도리어 웃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마땅하게 여겨진다. 나는 울며, 그러나 웃으며 대답한다.
---「동계올림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