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사방이 비에 젖은 이른 새벽이었다. 편도 세 시간에 가까운 거리를 달려왔으니 이 정도 비에 낚싯대를 펼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야심차게 낚싯대를 펼치고, 릴을 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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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길을 내고, 길은 사람을 이끈다. 그러므로 깊은 산간 계곡이 전과 같기는 쉽지 않다. 남방한계선을 지켜내며 치열하게 오늘을 버텨내고 있을 열목어를 생각한다. 오래전 오대산 줄기에도 흔하게 살고 있었다던 그들의 옛 시절을 상상해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응원의 방식을, 응원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을 좀 더 생각해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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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을 보내고, 얼음이 녹아 흐르는 봄이 되면 낚시를 다시 시작했다. 봄은 그렇게 많은 것들이 시작하는 시기이고, 낚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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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낚시를 혼자 다니지만 가끔은 일행들과 함께 할 때도 있다. 혼자 낚시 다니는 것은 그 나름의 자유가 있고, 일행과 함께 할 땐 왁자지껄한 즐거움이 있으니 둘 다 서로 다른 이유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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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그 계곡을 따라왔다. 잠시 차를 멈추고 계곡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 앞산은 내 코앞으로 병풍처럼 다가왔다. 세상을 놓고 돌아선 한 사람의 인생과 물에 빠진 새 핸드폰과 낚시꾼의 하루가 버무려진 그 어느 해의 오월을 생각했다. 여전히 북천의 산은 높고 물길은 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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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는 낚시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오가는 길의 침묵이 지켜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일생 말로 떠드는 직업을 가졌던 나는, 그 침묵의 시간이 더없는 평화였다. 그녀의 구슬꿰기처럼 말이다. 그 침묵의 하루 속에 이런저런 지나간 일들과 다가올 일들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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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지나는 길에 굳이 먼 길을 돌아 지수리에 들렀다. 낚시할 요량이 아니었으므로 낚싯대도 없었지만, 그곳이 궁금해서였다. 그 여러 해 사이 비포장이던 길은 포장이 되어있었고, 큰 다리가 놓였다. 평일이어서 여전히 강변은 고요했고, 푸르렀다. 그리고, 언덕 위에 여전히 홀로 누워있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 인사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저 혼자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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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반 잡는 것 없이도 낚시가 즐거운 꽝 조사에게 Bob Marriott’s fly shop은 낚시 가게면서, 성지순례지 같은 곳이다. 하지만 그것에 더해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우리 가족의 이야깃거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만 알고, 나만 기억하는 곳이 아닌 가족 모두 함께 기억하는 곳이기에 특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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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은 여럿 있었지만, 잡아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맞은편의 루어 낚시꾼 하나가 무언가를 잡아 올리다 놓치며 내뱉는 괴성을 들었다. ‘그 맘 잘 알지…’ 싶은 마음에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어쨌거나 내 낚싯대는 끝내 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난생처음 미국에서 낚시했던 몇 시간은 나의 낚시 인생에서 무척 색다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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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고 빛나던 젊은 시절, 흐르는 물가에서 함께 했을 그 낚싯대를 쓰다듬어 보았다. 귀를 대면 바닷소리가 들리는 소라고둥처럼, 어쩐지 낚싯대에서 힘차게 포말이 부서지는 계곡 물소리가 들릴 것도 같았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비늘이 지문처럼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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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낚시를 다니던 시절, 영동고속도로의 강천터널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강원도 표지판이 나오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시계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도 강천터널을 지날 때면 저 앞 어딘가에서 나를 따라오라 손짓하고 있을 시계 토끼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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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적요의 순간, 그 순간이 좋아서 낚시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인생의 페달을 멈추는 순간이다. 물론, 그런 적요의 순간은 일단 한 마리라도 낚아야 찾아온다. 나는 어쨌거나 낚시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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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낚시의 모토는 ‘catch and release’이다. 나 역시 물에서 건진 이야기들을 이제 release 할 시간이다. 내가 놓아준 이야기들이 계곡을 따라 더 큰물로, 더 멀리 헤엄쳤으면 하는 소망을 간직한 채 나는 이야기를 담았던 뜰채의 물기를 털고, 발걸음을 다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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