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전날, 그는 자신을 찾아온 오랜 제자 태호 스님에게 이제 떠나겠다고,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나, 내일 갈라네. 다비 그런 것 하지 마소. 그냥 그냥 흐르는 강물에 훠이 훠이 뿌려버리소.”
마침내 그날 2003년 11월 12일 수요일 저녁 무렵, 그는 성륜사 조선당에서 원을 조용히 불렀다. 낮에만 해도 사시 공양을 먹고 차담을 나누는 등 특이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였지만, 이때는 이미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나에게 의복을 좀 갖춰주소.”
중원은 그가 평소 만행 때마다 입고 다니던 승복을 가져와서 입혔다. 평소 쓰고 다니던 모자도 씌워줬다.
“나 혼자서 10분 정도 앉아 있을라네.”
중원은 그의 몸을 부축해 일으킨 뒤 바로 앉혀주었다. 그는 한동안 평소 수행하던 모습으로 앉아 있는 듯했다. 중원은 방에서 나오면서 생각했다. 큰스님이 평소처럼 앉아 계시는구나.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얼마 뒤, 그의 용태는 확연히 달려져 있었다. 깜짝 놀란 중원은 다급하게 제자 및 상좌들에게 알렸다. 천도재를 지내고 쉬고 있던 도일을 비롯해 상좌와 제자들이 조선당으로 달려왔다. 그가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도일이 스승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큰스님, 가시렵니까.”
“나, 갈라네.”
“큰스님, 앉혀드릴까요.”
“알아서 하소.”
도일은 이때 낮에는 눕지 않는 장좌불와 수행을 오랫동안 이어온 스승을 한 번쯤 편히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돌연 들었다.
“큰스님, 그냥 편안하게 가십시오.”
숨을 몰아쉬고 있던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제자 및 상좌들을 향해서 힘겹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대중과 화합 잘 하고 살아가시게. 승가란 화합이네.”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자 한국 현대 불교의 큰스님 청화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화합이었다. 대중과 화합 잘 하라고. 승가는 화합이라고. 그는 성륜사 조선당에서 도일을 비롯한 제자 및 상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2003년 11월 12일 오후 10시 30분. 그의 나이 80세요, 법랍 56세였다.
--- p.28-29, 「서장」 중에서
청나라 황제 순치의 「순치황제 출가시」, 부설 거사의 「사부시」, 금타 선사의 〈수릉엄삼매도〉를 보면서, 그는 속세에 대한 미련과 출가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있었다. 결심을 서서히 굳혀갔다. 장정 500명이 빗장을 열어도 열기 어려운 대문 같은 출가를. 귀의하리라, 거룩한 부처님께. 위대한 가르침에. 훌륭한 스님들께?.
--- p.71, 「제2장, 출가와 스승 금타, 새로운 출발」 중에서
붓을 집어 들었다. 토굴의 벽에다 없을 무(無), 나 아(我)의 무아를 써 내려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빌 공(空) 자를 쓰기도 했다. 쓰고 또 썼다. 벽이 검어질 정도로, 미친 듯이. 제법공과 무아를 체득하기 위해 백장암 토굴의 사방 벽에다 무아와 공 글자를 수천 번 썼다고, 그는 나중에 동안거 용맹정진 연속 법문에서 회고했다.
“겨울에 혼자 토굴에 있는데, 이놈의 ‘나’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어째서 무아인가, 어떻게 해도 무아, 내가 없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 말입니다. 머리를 제 아무리 찢어봐도 결국은 납득이 안 되거든요. 그때 사방 벽에다 무아, 공을 수천 번을 썼습니다. 이놈의 ‘나’가 하도 떨어지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 p.152, 「제4장 치열한 구도와 만행」 중에서
“해제를 하고 며칠이 지나니, 큰스님의 이가 그냥 쑥 빠졌습니다. 이를 쓰지 않고 영양 섭취가 안 돼 그냥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때 큰스님의 모습은 마치 부처님 고행상 같았습니다. 저는 큰스님이 꼭 부처님처럼 보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배가 등에 붙을 정도로 되자, 좌복을 배에 대고 끈으로 몸에 묶었습니다. 몸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절대 벽에 기대지도 않고 눕지도 않으시니 그렇게라도 하신 것입니다.”
--- p.155, 「제4장 치열한 구도와 만행」 중에서
“우리는 비록 사람일망정 우리 마음의 본바탕, 본성은 역시 부처입니다. 지옥 같은 마음, 사람 같은 마음들이 단지 요소로만 거기에 조금씩 묻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역시 본바탕, 본 저변은 부처라는 말입니다. 겉에 뜬 초점에서만 지옥이고, 지옥 같은 인연 따라서 되니까 지옥 같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인연 따라 업에 따라서 사람 같은 모양으로 태어나서 사람 같은 마음을 쓰는 것이지, 이 마음도 역시 저변에는 모두가 부처뿐이라는 말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회광반조(回光返照)라, 이 마음 돌이켜서 저변만 보면 그때는 우리가 부처가 되고 만단 말입니다.”
--- p.231-232, 「제5장 사상의 정립과 하화중생 모색」 중에서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는 다른 선방으로 공부하러 떠나는 제자 명원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1991년 태안사에서 행자 생활을 했고 계를 받은 뒤, 100일 기도 및 진불암 49일 기도를 정성스럽게 올린 제자였다.
“자네하고 부처가 둘이 아니네. 일체가 다 부처뿐이네. 자네가 본래 부처네.”
거창한 말이 아닌, 간결한 말이었다. 명원은 스승의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시원하고 감동적이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 p.301, 「제6장 태안사 시대와 회상의 형성」 중에서
“하루는 미국인 노보살이 큰스님을 찾아왔습니다. 큰스님을 만난 노보살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감격해 했어요. 그냥 기뻐서 운 노보살에게 큰스님은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마음은 하나여서 다 통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죠. 수행은 감춰져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수승한 수행자의 수행력은 위의로 이미 다 드러나는 것만 같습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동양의 수행자에게 드러낸 미국인의 감화와 귀의는 바로 큰스님의 수행력 때문이었죠. 감추어도 드러나는 수행의 아름다움이 그들에게 감동을 남긴 것입니다.”
--- p.339-340, 「제7장 붕정만리 성화미주」 중에서
그는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책상 앞에서 역주에 몰두했다. 심지어 하루 일종식마저 허술하게 먹을 정도였다. 어느 날 저녁, 시자 정륜이 쌀죽을 만들어 조심스럽게 밥상에 올렸다. 그는 죽을 맛있게 먹으며 말했다. “자네가 죽을 잘 쒔네.” 정륜은 신이 나서 이튿날 저녁에도 흰죽을 쒀서 올렸다. 그러자 그가 이번에는 정색을 하고서 말했다. “나는 일종식을 하지 않는가. 어제는 자네 성의를 봐서 죽을 먹은 것이네. 다음부터는 하지 마소.” 그는 더 이상 죽을 먹지 않았다. 정륜은 이후에도 스승의 건강이 염려돼 몇 번 더 죽을 쒀서 올렸지만, 그는 먹지 않았다.
--- p.415-416, 「8장 마음을 깨치면 모두 부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