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자, 준비! 하나! 둘! 셋!” 지혜의 구령이 끝나자마자 소현이, 희정이, 선아는 동시에 털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지혜가 먼저 깜짝 놀랐다.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표정이었다. 엄마도 크게 놀라 눈동자가 주먹만 해졌다. 하지만 소현이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아무 말 없이 희정이와 선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희정이와 선아 역시 눈물 고인 눈으로 소현이의 머리를 살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잠시 서로의 머리를 바라보다 마침내 와락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와 지혜의 눈가도 촉촉이 젖었다. 울음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희정이와 선아 둘 다 빡빡머리였다. 소현이까지 치면 세 명이 다머리카락을 완전히 밀어 여승이나 다름없었다. 강가의 둥근 돌처럼 반질반질했고 보석처럼 은은한 빛이 나기도 했다. (본문 63쪽)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거의 매일 이 은행나무 밑에서 어울려 놀았어. 재밌게 놀다가 이 밑가지에 이렇게 매달리곤 했었지.” 소현이 왼쪽 은행나무의 수평으로 뻗은 가지를 두 손을 들어 움켜잡았다. 까치발을 하고서도 키가 모자라 껑충 뛰어서였다. 잡자마자 갑자기 몸을 솟구치는가 싶더니 두 다리를 나뭇가지에 턱 걸쳤다. 두 다리의 오금을 가지에 걸쳐 머리와 등을 밑으로 향하게 한 자세였다. 소현의 돌발행동에 민혁이 놀라서 바짝 다가갔다. “어어! 위험해! 그러지 마!” “괜찮아.내가 이거 친구들 중에서 제일 잘했어. 사실 이거 해보고 싶어서 이리로 온 거야!”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소현은 아예 나뭇가지를 잡은 두 손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머리와 등을 쭉 펴고 두 손까지 직선으로 내렸다. 이제 오금만 이용해 거꾸로 매달린 자세가 되었다. 민혁이 기겁을 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소현을 잡으려고 두 팔을 쭉 펼쳤다. “아냐! 그대로 둬!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다 뒤집어져 보여.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 같아. 오빠도 나처럼 해봐!” “나는 못해!” “이렇게 흔들흔들하면서 보면 더 재미있어! 저 산들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그러거든. 그리고 한참 이러고 있으면 자신의 미래를 볼 수도 있다고 그랬어, 예전에 동네 언니들이. 그래서 우린 더욱 세게 흔들곤 했었지. 하하!” 소현은 거꾸로 매달린 자세로 몸을 흔들기까지 했다. 민혁은 너무 조마조마해서 간이 콩알만 해졌다. 그것도 모르고 소현은 더세게 몸을 흔들었다. “안 돼!” 떨어질까 겁이 난 민혁은 반사적으로 소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순간 둘의 눈길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눈길은 한 뼘밖에 안 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잠시 서로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현과 민혁의 눈동자 속에는 잔잔한 호수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아주 깊고도 맑은 호수였다. 너무 맑아 눈이 부셨다. 소현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민혁이도 살며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서로의 호수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다가갔다. 숨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곧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마치 자목련 꽃잎이 입술에 떨어져 내린 듯한 느낌이었다. 소현과 민혁의 입맞춤을 축복하려는 듯 멀리 서편하늘에 저녁놀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고운 분홍빛이었다. 은행잎 하나가 공중을 날아 땅에 떨어지자 소현이도 나뭇가지를 놓고 땅으로 내려와 바르게 섰다.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노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첫 키스였다. 오 초가 될까 말까 한 짧은 입맞춤이었다. 꽃잎에 스쳐간 봄바람 같았다. 조금 창피했다.얼굴이 화끈거렸다. 세상에! 원숭이처럼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첫 키스를 하다니? 완전 몽키 키스였네! 엄마 아빠는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 날 나무 벤치에 앉아 로맨틱한 첫 키스를 나눴다는데. 돌아보니 너무나도 황당하고 우스웠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본문 196~198쪽)
“여태껏 나는 누군가를 온 영혼을 다해 사랑해본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뒤 고개를 가로젓곤 했어! 과거의 기억을 모조리 꺼내 펼쳐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거든. 온통 무의미하게 스쳐 지나간 만남들뿐이었지. 진정성이 결여된 가식적인 만남들만 빼곡하더라고.” 그 말을 하고 나서 홍 간호사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희정이와 선아는 휴지로 눈물을 닦고 서로의 손을 잡았다. 소현이 생각에 자꾸 눈물이 고였다. 목청을 가다듬고 난 홍 간호사가 안정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친구인 너희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소현이의 병은 애초에 가망이 거의 없었어! 좀 과장해서 말하면 병원에서 여러 실험도 하고 수익도 올리려고 잡아둔 것에 불과하지! 치료를 꾸준히 하면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억지로 생명을 더 연장시킬 수는 있었겠지만……. 본인이 모든 치료를 거부하더라고. 민혁이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