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륄은 역사 단계에 관한 마르크스식 결정론을 채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을 더욱 확장하고, 발전시킨다. 엘륄의 시각에, 인간의 자유를 축소하고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주범은 단지 자본주의만이 아니다. ‘기술’(technique) 역시 주범이다.
--- p.30
소외와 이데올로기의 해법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그 해법을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역사의 차기 국면으로 보았다. 엘륄은 성령에 복종하는 삶으로만 소외와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p.33
엘륄은 키르케고르의 변증법 논리를 유산으로 물려받아 기술과 정신(영)의 영역에 적용한다. 그러나 엘륄의 신학은 ‘선택’ 대신, ‘소망’을 결합의 요소로 제시한다.
--- p.37
“자끄 엘륄이 제시한 모든 사상과 분석에 담긴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그의 저작이 철저한 변증법으로 이뤄졌다는 데 있을 것이다. 모순, 대립, 역설은 엘륄의 시각에 늘 존재한다. 그는 자명하고, 연역적이며, 직선적인 논리를 거부한다. 합리주의 성향의 ‘과학주의’는 거부 대상이 된다. 기독교 사상이든 사회이든 엘륄의 이해는 동시 작동하는 다양한 반정립 요소와 권력에 대한 지각에서 비롯된다.
--- p.43
엘륄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앎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직관의 출처는 계시이며, 신앙은 이를 수용한다. 이러한 일이 발생 가능한 기본 방식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취와 체험이다.
--- p.70
엘륄은 기술을 두 가지 방식으로 규정한다. 첫째, 기술은 “인간의 ‘모든’ 활동 분야에서 합리적으로 도달하는 방법들 및 절대 효율성을 갖는 방법들의 총체”이다. 둘째, 기술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 발견되는 특수한 기술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이다. 기술은 추상적인 방법이자 구체적인 현상이다.
--- p.108
기술의 합리성은 우리의 창조성을 강탈하며, 인공성은 자연을 파괴하고, 자동성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엄금할 것이다.
--- p.117
엘륄은 기술에는 언제나 비용이 뒤따르고, 그 값은 지구의 참살이와 개인의 자유가 상실된 지분이라고 지적한다.
--- p.123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가릴 것 없이 현대 국가는 기술, 군대, 선전과 불가분 관계로 엮인다.
--- p.172
정치는 더는 선택이나 자유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정치는 권력과 효율성의 문제이다. 엘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치의 자율성은 근본적으로 무력의 결과물이다.” 국가의 존재 자체는 무력과 폭력 사용에 의존하며, 이러한 사용에서 분리될 수 없다.
--- p.179
오늘날 국가가 따르는 유일한 법은 효율성, 권력, 통제 등을 아우르는 법, 즉 ‘기술의 법’이다.
--- p.180
정치 참여가 자유의 상실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확보할 수 있으며, 사회에 구체적인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는가? 엘륄의 명쾌한 대답은 그의 신학에서 나온다. … 해법을 위해 우리는 영의 영역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 p.181
소망은 현재 이 순간의 문제이다. 따라서 체계화할 수 없고, 신학이나 철학으로 다듬을 수도 없다.
--- p.191
엘륄은 “소망이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침묵하는 시간, 그리고 우리 자신과 체계를 포기하게 했던 바로 그 시간에 소망의 싹이 튼다. 하나님은 침묵을 택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진실하고도 유일한 대답은 소망이다. … 오히려 소망은 하나님에게 요구한다.
--- p.192
기독교 아나키즘은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한다. 바로 폭력에 대한 절대 거부권과 현시대의 어떤 정치 체제에도 희망을 걸지 않는 것이다. … 대신, 그리스도인들은 위계질서와 무관한 새로운 제도들을 풀뿌리에서부터 조직하고 창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p.201
그리스도인들의 세 가지 입장인 타협, 비폭력, 폭력 긍정과 관련해, 엘륄은 생명과 예수의 가르침에 일관성 있는 유일한 길은 비폭력이라고 생각한다.
--- p.213
우리는 현대 세계에 대한 “현실주의”의 시각을 택함으로써만 폭력의 사용에 맞서는 확고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 현실주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현실을 변증법의 눈으로 본다. 둘째,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 p.220
엘륄의 눈에 기독교 현실주의는 우리를 언제나 타인과 세계에 대한 겸손과 동정의 시각을 갖도록 유도한다. 누군가 현실의 복잡성과 다면성, 아름다움을 보고, 현실과 하나님의 화해를 충분하게 이해한다면, 겸손과 동정이 반드시 뒤따를 것이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폭력의 본성을 밝히도록 한다.
--- p.220
예수는 비폭력 노선을 택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자유의 길이 절대 쉽지 않은 길이라는 점을 몸소 보였다.
--- p.233
엘륄은 간결하게 덧붙인다. “무엇보다 나는 아나키즘을 폭력에 대한 절대 거부로 여긴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엘륄은 폭력이 본질상 성서 및 그리스도의 전언과 반대된다고 믿으며, 어떤 형태든 폭력의 사용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폭력은 국가와 절대 분리될 수 없고, 폭력 거부는 곧 정치 거부를 뜻하기 때문이다.
--- p.235
기독교 아나키즘 선언은 사랑과 자유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유래한다. 인간을 노예와 억압의 기제에 밀어 넣는 기술 세계에서, 하나님은 끝없이 인간을 해방하려 한다. 그러나 엘륄의 변증법에 따르면, 필연의 영역에 살면서도 자유로운 존재로 사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강인한 힘과 소망은 살아있는 하나님과의 능동적인 관계 맺음에서 도래한다.
--- p.243
엘륄의 신학은 그의 철학과 사회학의 대칭점을 형성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한 전적 타자가 필연의 영역에 자유를 가져온다는 신념이 일륄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
--- p.249
사실상 엘륄의 저작은 대중에 대한 계몽을 겨냥한다. 즉, 우리가 얼마나 기술에 얽혀서 사는지, 얼마나 하늘의 소리를 듣고 사는지를 깨달으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해방의 방향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 p.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