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이미지에 관하여 탐구하면서 내면적 자아라는 판타지가 얼마나 견고한 동시에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내면성을 비판한다는 것이 곧 주체 없는 실재를 논한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균열이다. 세계 그 자체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바의 세계 사이의 균열. 최근 활발히 활동하는 사변적 실재론이 보여 주듯 ‘거대한 외부(Grand Dehors)’, 곧 주체에게 상대적이지 않은 세계 그 자체를 논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이미지 배후의 실재라는 낡은 독단을 답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면성의 신화만큼이나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일찍이 니체가 지적한 ‘배후세계(Hinterwelt)의 착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외의 혹은 이상의 실재가 있으리라는 믿음은 정당화된 것이 아니라 그저 선언된 것일 뿐이다.
--- 「들어가며」 중에서
‘나는 사유한다’는 데카르트가 온갖 혼란스러운 표상들 사이에서 발견해 낸 최초의 명석 판명한 인식이다. 데카르트는 단 하나의 확실한 인식인 이 코기토 명제에 기초해서 확고부동한 지식의 체계를 건설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시도는 ‘나는 사유한다’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가진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말하자면 모든 이미지들은 늘 거짓일 수 있기에 지식을 추구할 때 원칙적으로 배제되어야 하지만, 코기토로 표현되는 나의 사유는 어떤 의심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진실성을 담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지와 사유는 가장 먼 곳에 위치하는 두 극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데카르트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않았던 ‘상상’에 주목할 때 문제는 복잡해진다. 이상한 것은 데카르트가 이미지에 대해 불신을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상상에 관해서는 긍정적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상상 능력(facultas imaginandi), 즉 상상력(imaginatio)이란 라틴어 단어가 보여 주는 그대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이미지와 관계하는 상상력 역시 참된 지식을 구하는 과정에서 배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데카르트는 상상력을 사유의 한 양태로 본다.
--- 「1장 ‘데카르트의 꿈’」 중에서
가상에 관한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고대의 비유에서부터 이미지에 대한 의심은 여전하고, 설상가상으로 실재와 이미지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불안은 나날이 증대한다. 불안은 타인에 대한 경멸로 손쉽게 뒤바뀐다. 이를테면 “나가서 사람을 좀 만나.”라는 핀잔. 매체 속의 가상적 현실에 빠져 있지 말고 현실로 나가 실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좀 보라는 것만큼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이 또 있을까? 일찍이 플라톤은 우리를 현혹시키는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동굴 바깥으로 나가 눈부신 태양을, 곧 무시간적인 본질을 가진 영원의 상인 이데아를 관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동굴 밖으로 나가라’는 잔소리가 오늘날까지 반복되고 있다.
--- 「3장 ‘플라톤의 동굴’」 중에서
포박되고 구속된 죄수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인간에게는 그 어떤 능동성도 활력도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저 동굴의 벽면을 바라보는 일이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수동적인 태도로 주어지는 것들에 순응하는 인간의 초상에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은 그 자신을 꼼짝할 수 없도록 구속하는 상황에서도 늘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다. (……)
우리는 질병을 앓고 있거나 가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 가난과 질병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상상은 자기가 놓여 있는 조건과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변화시킬 가능성을 형성한다. 특정한 자연적·사회적 현실 속에 내던져져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의 타고난 신체적 조건을 변형할 수 없으며 태어날 때부터 속해 있는 계급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만큼은 결코 그와 같은 현실적 조건들에 의해 제한될 수 없다. 자신이 처해 있는 문제 상황을 자각하고 나아가 다른 삶을 상상하고 또 기투함으로써 우리는 언제든 그것을 넘어서고 개선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의식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우며, 상상은 이 자유의 표현과 같은 것이다.
--- 「5장 ‘상상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활자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선행된 문법이라면, 이미지의 경우에는 어떤 문법도 미리 주어지는 법이 없다. 흄이 보여 주었듯 이미지의 세계는 “접속사 ‘그리고’가 동사 ‘이다’의 내성의 자리를 빼앗는 세계”, “잡동사니의 세계, 전체화가 불가능한 단편들의 세계”이다. 경험은 미리 주어진 문법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문법을 배우는 것은 정돈되지 않아 혼란한 이미지들로부터이다. 들뢰즈가 영화로부터 새로운 비전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이처럼 스크린이 틀에 박히고 제한된 일상의 관점을 넘어, 생경하며 낯선 시선으로 보는 세계를 비추기 때문이다. 스크린에서는 언제나 일상을 벗어난 모험이, 새로운 문법을 찾는 경험주의자의 실험이 일어나고 있다.
--- 「8장 ‘스크린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서
온라인 공간에서는 일종의 집단적 차원의 유아론이 재현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발견되는 디지털 부족화 현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커뮤니티 내의 소통은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형식마저도 잘 설계된 핑퐁 게임과 같다.
애석하게도 그 바깥은 미지의 영역이며 언제나 예상을 넘어선다. 현실에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도대체 왜 벌어지는지 나와 이웃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런 것쯤은 불가해한 것으로 남겨 두자. 사실 이 안온한 공간에도 이따금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 출현하지 않는가. 모든 커뮤니티에는 때때로 어디서 유입되었는지 알 수 없는 불순분자들, 산통을 깨고 어그로를 끄는 골칫덩이들이 찾아온다. 그런 족속들을 상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는 것이다. 온라인 공동체의 평화는 이렇듯 우리와 다른 것에 대해 눈을 감음으로써 유지된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온라인 공간은 사실 폐쇄적이다.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자유롭다. 그러나 이 자유는 철저히 한계 지어져 있기에 우리는 이 한계 너머로 나아가는 방법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 「9장 ‘타자를 만날 수 있을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