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종말론에 관해 성경이 세 가지 R을 가르친다는 점에 주목하기 좋은 때다. 그 세 가지는 그리스도의 재림(Return), 몸의 부활(Resurrection), 만물의 회복(Restoration)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 지금 “주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지만 아무래도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아직 다 받지 못한 것 같다. 이들은 예수가 이 땅에 돌아오실 때 받게 될 부활체를 아직 기다리고 있다. 성탄절 전날 밤이 되어야 아이들에게 양말을 열어 보라고 허락하는 지혜로운 부모처럼, 우리 아버지는 우리에게 약속된 선물을 우리가 죽는 순간에 모두 주시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가 죽는 순간 아버지는 우리가 일찍이 받아 본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을 주신다. 이생에서 우리 구주의 품으로 바로 건너가니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이라는 성탄절 아침을 위해 더 많은 선물을 아껴 놓으신다. 그날이 되어야 우리의 구속(救贖)은 완성될 것이다. 그날이 되어야만 우리는 우리에게 있을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회복될 것이다.
--- 「서문(마이클 위트머)」 중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내생(來生)의 다양한 단계를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종말론에 관해 혼란을 야기한다. 신학자들은 보통 하나님이 개별 신자들에게 약속하신 미래를 ‘중간 상태’와 ‘최종 상태’로 구별함으로써 이런 혼란을 피한다. 성경은 우리가 주와 함께 있다는 것 외에는 중간 상태에 관해 별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천국에 갔다가 예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온 사람들을 축하하는 ‘천국 관광’류의 책들과 달리 성경은 천국을 ‘천국답게’ 해 주는 것은 예수의 존재임을 지적한다. 그런데 중간 상태는 성경의 초점이 아니다. 성경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종말, 즉 예수가 재림하셔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고 심판하시며 만물을 회복시키실 때다. 우리도 이 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 책은 중간 상태, 즉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의 최종 상태, 즉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생기는가에 관한 책이다. 그날의 끝, 모든 말씀과 일이 다 이뤄졌을 때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 영원히 살게 될까? 그곳은 어떤 곳이며,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하게 될까?
--- 「서문(마이클 위트머)」 중에서
나는 우리가 좀 더 독특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된 후 우리는 여전히 몸과 영혼의 통합적 결합체일 테지만, 인간을 이루는 각 부분(물질적 부분과 비물질적 부분)은 영화롭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몸은 영화롭게 될 것이고, 노화의 부정적 징후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몸은 병들거나 쇠약해지거나 죽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영혼도 영화롭게 될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이루는 비물질적 부분이 아직 영화롭게 되지 못한 자연적 상태에서 했던 모든 일(예. 사고하고, 추론하고, 감정을 품고 표현하고, 숙고해 선택하는 일)을 할 수 있되 죄의 가능성 없이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추측건대, 우리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일, 대체적으로 어떤 일이든 영화롭게 되지 못한 상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 있되, 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높이는 방식으로 하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방식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 「1장 전통 복음주의 개신교 관점(존 파인버그)」 중에서
새 땅에는 가꾸어야 할 정원도 있고, 깎아야 할 잔디도 있고, 지어야 할 집도 있지 않을까? 개조가 필요한 구조물(집이나 건물)이 있지 않을까? 성경은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것 중 ‘수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가 수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영화롭게 된 상태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그저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을 묵상하는 시간이 있을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우리가 새 땅의 (그리고 어쩌면 새 하늘의) 다른 부분으로 가서 하나님이 능한 손으로 만들고 보존하시는 이곳을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 「1장 전통 복음주의 개신교 관점(존 파인버그)」 중에서
새 예루살렘의 이미지는 복합적이다. 이곳은 사람들이 살아갈 장소, 하나의 도시다. 또한 새 예루살렘은 사람들, 즉 어린양의 신부이기도 하다. 한 도시로서의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는 하나님이 고립된 개인을 구속하지 않으심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공동체 안의 사람들, 심지어 사회문화적, 도시 환경 속의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이는 새 땅에 인간 문화를 위한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갈]”(계 21:26) 것이라는 말은 역사 전체를 통해 발전되어 온 인간의 최고 기량에 대한 언급이다. 인간이 새 예루살렘에 기여하는 것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 「2장 새 땅 관점(리처드 미들턴)」 중에서
새 창조 세계에서는 상황이 확실히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가 아무리 지금과 다르다고 해도 나는 우리가 (죄 없는 세상에 걸맞게 변화된) 평범한 문화 활동에 참여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의 논리가 이를 암시할 뿐만 아니라, 만국의 존귀와 영광이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요한의 환상도 문화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의 공적이 일부는 불에 타 없어지겠지만, 어떤 공적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때 정화되어 다가올 시대로 들어갈 것이라는 바울의 생각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이 과거에 이룬 최고의 업적이 지속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침내 죄의 훼방을 받지 않는 창의력으로 탐험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 「2장 새 땅 관점(리처드 미들턴)」 중에서
결국 하나님은 땅에서 하늘을 완성하신다. 태초(the beginning)는 딱 어울리는 마지막(the end)을 찾아낸다. 아니, 마지막이 태초라는 용어에 딱 들어맞는다. 현대 신학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기독교 신학의 어머니로서 종말론에, 심지어 때로는 종말론적 사조에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종말론을 뒤늦은 착상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다양한 유파의 현대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전 영역을 형성할 때 종말론이 그 체계를 세우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계시키려 애써 왔다. 카를 바르트는 이렇게 일갈한다. “전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종말론이 아닌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전혀, 그리고 전적으로 무관하다.”
--- 「3장 지상의 천국 관점(마이클 앨런)」 중에서
여러 면에서 우리는 우리 모두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제한된 일만 하게 되리라는 뜻은 아니며, 다만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성경에 별 언급이 없다는 뜻이다. 지나친 단순화를 피하려다가 말도 안 되는 결론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안타깝게도 요즘 설교에서 이런 경우를 자주 접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곳에서 언제까지나 하나님만 찬양하리라는 개념에 대해 변명을 하거나 심지어 이를 조롱까지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사실 장차 천국에서의 우리 삶에 대해 실제적으로 단언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것뿐이다.
--- 「3장 지상의 천국 관점(마이클 앨런)」 중에서
가톨릭의 연옥 교의는 시간을 가리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연옥에서 300일’이나 ‘연옥에서 10년’ 같은 표현은 이 땅에서 우리가 쓰는 시계가 측정하는 시간을 뜻할 수 없다. 연옥은 이 우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300일이나 10년 같은 시간은 ‘크로노스’(kronos)가 아니라 ‘카이로스’(kairos), 즉 물리적 시간이 아닌 영적 시간이어야 한다. 숫자는 사실상 초기 교회에서 심각하고 공공연한 죄에 부과하는 참회 기간에서 온 것으로, 이를 연옥에 적용할 때 이 기간은 상대적이고 비유적인 비교의 의미로 쓰였다. 죄가 많고 중할수록 연옥이 그만큼 더 필요하다. 몸이 더러울수록 더 씻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연옥에서 영적인 시간을 얼마나 많이 보내느냐는 (그런 시간이 존재한다면) 전혀 다른 문제이며, 대답은 불확실하다.
--- 「4장 가톨릭 관점(피터 크리프트)」 중에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 때 우리 삶에 일어난 비극적인 일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천국은 행복한 치매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도 행동이 정념을 이긴다. 우리는 그 사건들을 마치 사진을 볼 때처럼 우리 마음이 그 사건들에 순응만 하고 아무것도 덧붙이지 못한 채 그저 수동적으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마치 화가가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듯, 혹은 작가가 비교적 훌륭하지 못한 자기 작품에 관해 비교적 훌륭한 해설을 쓰듯, 그 일을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보잘것없는 책에도 훌륭한 해설이 붙을 수 있다.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당시 우리가 그 일을 볼 때처럼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듯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교정과 재해석 과정을 통해 그 사건의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악조차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에 의해 선을 이루어 냈는지 알게 될 것이다(롬 8:28).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이를 믿을 수 있지만(이는 자유로운 선택이므로 정념이 아니라 행동이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듯 이를 눈으로 보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불완전한 이야기들을 하나님의 완전한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history)를 그분의 이야기(His-story)로 보게 될 것이다.
--- 「4장 가톨릭 관점(피터 크리프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