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이렌오더 닉네임은 평범하다. 나무다. 며칠 전에는 사이렌오더로 주문 후 텀블러를 전달하려고 줄을 서 있는데, “나무 고객님이시죠?” 하고 카운터 안의 파트너가 먼저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그때 ‘아, 닉네임을 바꿀 때가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도둑은 항상 제 발이 저린 법. 그 뒤로 닉네임을 바꾸었다. ‘트리’로. 인생은 거기서 거기죠.
--- p.16~17
스타벅스에서는 음료를 마시면 별을 하나씩 적립해주는데 오늘은 텀블러를 깜박하고 놓고 와서 에코별 한 개를 받지 못했다. 가방을 열다 텀블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의 아찔함은 교과서를 빼먹고 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12개를 모으면 자그마치 무료 음료 쿠폰을 주는데.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라고 윤동주 님은 별을 노래하셨지만, 나는 별 하나에 무료 쿠폰을 꿈꾼다. 쪼잔하다.
--- p.22~23
옆자리에 앉은 등산복 언니들의 얘기는 계속 오른쪽 귀를 파고들었다. 중년의 사람들, 만나면 하는 이야기가 다 똑같구나. 이들도 ‘누가 누가 더 아프나’ 배틀이다. 한 사람이 어깨가 아프다고 하면 어깨 받고 난 허리, 어깨와 허리받고 난 무릎, 이런 식. 더 많이 아프다고 메달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친구를 만나면 아픈 곳 자랑부터 하게 될까. 전혀 남 얘기 같지가 않았다. 속으로는 이미 일행이다.
--- p.60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 한 마리 더 잡아먹는지 모르겠지만, 잠을 덜 잔 탓에 벌레를 먹고 나면 식곤증 탓에 다시 자느라 하루를 망친다. 출근 시간이라 지하철 역 앞 붐빌 테니 집에서 일 좀 하다 갈까. 다 싸둔 스벅 가방에서 노트북과 책을 꺼냈다. 음, 겨우 두세 페이지 번역했는데 잠이 쏟아진다. 소파에 잠깐 누웠는데 일어나 보니 한나절이 다 갔다. 스타벅스에 가도 자리 없을 시간이다. 일찍 일어나지 마라, 새야. 살던 대로 살아.
--- p.70~71
사이렌오더에 14번째 주문이라고 알림이 떴다. 새로 온 손님도 안 보이는데 그렇게 밀렸다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파트너가 오더니 “○○역점으로 주문한 것 맞으세요?” 하고 내게 물었다. ‘당연하죠’라고 생각하며 주문 내역을 확인해보니, 하하하…. 길 건너편에 있는 ○○사거리점에 주문했네. 허기 탓이다. 지하철역을 내려가서 건너편 매장으로 열나게 뛰었다.
--- p.96
판매자와는 곧바로 만나기로 했다. 그가 지정한 장소는 스타벅스와 가까웠다. 잘됐다, 나간 길에 스타벅스에 가서 일해야지. 어디 계세요?” 하고 챗을 보내고 두리번거리는데, 2차선 도로 건너에서 60대(혹은 그 이상) 아저씨가 까만 비닐봉지를 흔들며 “당근??” 하고 소리쳤다. 아아, 쪽팔려. 버스 정류장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나와 아저씨 사이를 미어캣처럼 오갔다. 미어캣들의 시선에 등짝이 100도로 타오르는 것 같았다.
--- p.117
철없던 시절(근래까지도 철이 없었다)의 나는 “정말 동안이세요”라고 하면 “그쵸”라고 대답했다. 역겨워서 한 대 치고 싶었을 것 같다. 안 맞고 산 게 용하다. 요즘은 “동안이세요”라고 하면, “아니에요. 엄마 간병으로 고생해서 몇 달 사이에 폭삭 늙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대답도 재수 없긴 마찬가지일 것 같다.
--- p.125
매장에 슬슬 자리가 없어져간다 싶으면 정리하고 돌아온다. 소심한 내게는 스타벅스가 그나마 작업이 가능한 카페다. 스타벅스에는 카공족도 많지만, 테이크아웃 해가는 고객도 많더라. 그럼 쌤쌤이지 않나. 그리고 카공족은 언젠가 취업해서 직장인이 되어 테이크아웃을 하러 올 것이다. 과연 나는 언제까지 카공족 속에 끼어서 일하고 있을까.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도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나를 상상해보았다. 오, 멋있는데?
--- p.132~133
검사를 받고 온 엄마는 내게 무용담처럼 그 얘기를 해주었다. “얼라들도 다 아는 시시한 걸 묻는데, 속으로 ‘내가 그것도 모를까봐’ 하면서 다 모른다 그랬어.” 그렇게 똑똑한(?) 엄마였는데, 올해는 그 질문들에 하나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치매 검사를 하시는 분이 “할머니, 오늘 며칠이에요?” 하자 엄마는 “(한여름이었는데) 며칠 전에 설이었으니 정월 보름”. 또 “할머니, 우리나라 이름이 뭐예요?” 하자 엄마는 “조선이지”. 그래, 조선의 할매, 앞으로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 p.155~156
아이는 별의별 상처를 받고, 극복하며 어른이 된다. 지금 육아일기를 쓴다면 상처받지 않고 곱게 살기를 바라기보다, “어떤 상처도 이겨낼 수 있는 멘탈이 강한 아이로 자라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것 같다. 옆자리 어린 친구도 실연의 아픔 툴툴 털어내고 혼자로 단단한 삶을 생활 즐기기를. 실연한 사람에게 똥차 가고 벤츠 온다고 위로하지만, 그야말로 위로일 뿐 벤츠를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벤츠 기다리지 말고 네가 벤츠가 돼버려.
--- p.167
몸이 불편한 아이가 있으면 가정에 그늘이 있을 거라는 편견이 깨졌다. 엄마와 아빠가 아이를 사랑하는 모습만 보이고 아무런 그늘도 보이지 않았다. 장애가 있건 없건 내 아이는 사랑스럽기만 한데 남들이 편견을 갖는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강아지 나무의 두 눈이 새하얘져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징그러워하거나 무서워할 때도 정하와 나는 “아유, 귀여워, 우리 나무 너무 귀여워” 하며 물고 빨았다. 가족의 마음은 그런 것이었다.
--- p.170
“일하시는데 시끄럽게 떠들어서 죄송합니다.” 아, 그 문제요. “(귀에 이어폰을 가리키며) 아닙니다. 이어폰 끼고 있어서 안 들렸어요.”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세요.” “감사합니다.” 이어폰 껴서 안 들렸다고 하면서 그분이 나직하게 하는 말 다 듣고 대답한 아줌마. 옆에서 일하는 사람 시끄러울까봐 아저씨는 내내 신경이 쓰이셨나 보다. 스벅에서 떠드는 사람은 많지만, 사과하시는 분은 처음 보아서 신선한 감동이었다.
--- p.189
육두문자가 들려서 소리의 원천을 찾아보니 아주머니가 아니고 젊은 여성이었다. 듣기 민망한 쌍욕이 계속 이어졌다. 충격이었다. 나도 ‘아줌마’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육두문자를 써본 적 없다. 전화 통화하는 소리에 너무도 당연하게 아주머니를 의심했다. 반성, 대반성. ‘공중도덕 안 지키는 사람=아줌마’라는 편견이 아줌마인 내 머릿속에도 뿌리박혀 있었다니. 무섭다. 조용한 카페에서 육두문자하는 젊은 여성이 아니라, 나의 편견이.
--- p.228~229
번역을 마칠 즈음이 되니 이 그림체 너무 귀엽다. 너도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것이었더냐. 그림체가 무라카미 하루키다운 스토리를 배가시킨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남은 일을 마저 하려는데, 점심시간인지 옆자리에 직장인 팀이 앉으면서 시선은 춘화 급 그림이 있는 만화책으로…. 엄마 몰래 성인지보다 들킨 아이처럼 후다닥 덮고 가방을 챙겨서 집에 왔다. 아아, 샌드위치 괜히 사먹었어.
--- p.256
“우울증이 심한 놈이어서 내가 연락을 피하는데 잘못 받았네.” 소외당하는 사람도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었다. 누군가가 우울증으로 자살하면 ‘그렇게 힘들면 나한테 말을 하지’라고 지인들은 SNS에서 애도하지만, 힘들 때 연락하면 저렇게 귀찮아하는 게 사람이다. 설 자리 없어진 아버지들 짠하게 생각하다가 싸하게 식었다. 나도 참 주제넘게 누굴 걱정하는지. 하여간 쓸데없이 남발하는 인류애가 문제다.
--- p.259
“〈브러쉬업 라이프〉처럼 인생을 리셋한다면 그날 오후에 아빠를 만나러 갔을라나. 가면 아빠를 만나야 하고, 가지 않으면 너를 못 만나고. 어려운 문제다.” 너님, 그런 진지한 고민은 결혼하기 전에 했어야…. 옆자리 예비부부는 어느새 가고 없다. 부디 행복하고, 결혼으로 인해 불행하다 생각하면 언제라도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내시기를. 참고 산다고 좋아지지않아요. 근데 이게 덕담인가. 재 뿌리는 건가.
--- p.275
한참 일을 하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아이와 엄마는 집에 가려고 밖에 나와 있었다. 언젠가 또 동네에서 마주치길 기대하며 헤어졌다. 자리에 돌아와서 보니 노트북 위에 하트 모양의 스벅 마카롱이! 그러잖아도 정하가 일하며 먹으라고 사준 수제 쿠키가 있어서 아이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심전심. 얼른 뛰어나가서 모자를 쫓아가 쿠키를 선물했다. 일은 별로 못했지만, 왠지 자꾸 웃음이 쏟아지는 오늘의 스벅이었다.
--- p.282~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