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세력을 더해가는 허구 앞에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현실이 부드러운 배를 보이며 뒤집어져 있었다. 이제 내가 상상하는 이 현실 세계는 현란한 허구 세계의 이음새로 흐르는 지저분한 강 같은 것이었다. 허구에서 허구로 직접 건너갈 수 없어서 일일이 현실이라는 시궁창에 깊이 몸을 담가야 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현실로 돌아올 때는 ‘가라앉는’, 그리고 허구로 들어갈 때는 ‘떠오르는’ 거의 육체적인 감각이었다. 나는 24시간 그 부침을 계속하며 너덜너덜한 몸과 정신으로 생각했다.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파멸적인 일이.
---「식서」중에서
그 순간은 불현듯 찾아왔습니다. 처음으로 인간의 귀에 들어간 순간이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그 신기한 감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추락감’일까요. 뜻밖에도 상대의 귓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먼저 몸이 붕 뜨는 부유감에 휩싸이고, 다음 순간에는 상대의 귓구멍과 자신의 손 모양이 저 밑으로 보이는데, 그 역시 거대한 우물에 팔목을 잡혀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듭니다. 네, 한마디로 무섭죠. 익숙해질 때까지 20~30번은 들어가봐야 하지 않았을까요. 옆에서 보기에는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지만, 실제로 들어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순간을 늘려놓은 것 같은 감각에 빠져, 한없이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추락하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여유가 생기면 일종의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지만 나오지 않는, 기나긴 사정과도 같은 쾌감을요.
---「미미모구리」중에서
살아남는 자들도 있었다. 행려병자처럼 며칠이나 그곳에 방치되었다가, 어느 날 스르륵 일어나 새로운 잿빛 짐승들의 일원으로 거리를 헤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회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마음 같은 건 한 조각도 없는 듯했지만, 어딘가에서 동료를 원하는 본능이 작동하는지, 한 사람 또 한 사람 모여 이내 집단을 이루어, 망자의 무리처럼 느린 걸음걸이로 밤낮없이 끊임없이 배회한다. 의외로 회인들이 직접적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일은 없고, 그저 죽은 눈동자로 느릿느릿 걸어 다닐 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이 세계에 해를 끼치고 있는 건 분명했다. 필시 회화라는 역병의 첨병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병원균을 흩뿌리며 방황하는 것이다.
---「상색기」중에서
정말 이 여자의 집으로 가는 건가? 불안은 깊어갔지만, 이율배반적으로 거대한 기대와 격하게 출렁이는 살덩이의 이미지가 가슴 한가득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순간, 유키에의 힘없는 미소와 팔랑팔랑 흔들던 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서, 그는 흠칫했다. 현실로 돌아와. 그래. 이 여자와 담판을 짓기로 한 거 아니었나?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버럭 소리치려던 거 아닌가? 악몽 같은 관계를 끝내고 인생을 정상적인 세상으로 되돌려놓으려던 게 아니었나? 하지만 그 내면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고 가늘었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고깃덩어리 같은 욕망에 유키에의 작은 몸이 눈 깜짝할 사이 파묻혔다.
---「부드러운 곳으로 돌아가다」중에서
반투명의 검붉은 액체가 가득 찬 거대한 유리 탱크가 눈앞에 우뚝 서서 데루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탱크는 누에고치를 세워놓은 듯한 모양이었고, 높이는 6미터쯤 되어 보였다. 둘레는 네다섯 명이 손을 잡고 에워싸야 할 정도였다. 언뜻 봐서는 레드와인을 가공하는 기계 같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약간 끈기가 도는 피 같은 액체 속에서 뭔가 꺼림칙한 형태의 무수한 불순물들이 부유하는 광경이 두툼한 유리 너머로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그 불순물은 모두 5~6센티미터 크기에 인간의 피부 빛깔을 띠고 있는 것 같았는데, 탱크 곳곳의 탁한 그림자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쉽사리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혹시 이건…….
---「농장」중에서
상자를 여는 바스락 소리가 실내를 뒤덮었고, 이내 곳곳에서 우아, 꺄악, 하는 비명인지 신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쭈뼛거리며 상자를 연 나는 화들짝 놀랐다. 상자 바닥에 유카타 같은 기모노 한 벌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문제는 재질이었다. 온통 새카맸다. 한마디로 머리카락으로 짠 홑겹의 옷이었다. 등골을 타고 오한이 들었다. 이 방 하나에만 수백 명이 있는데, 설마 이게 전부 교주의 머리카락일 리는 없겠지.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나같이 혐오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는데, 애초에 잘라낸 머리카락을 싫어하는 나는 누구 것인지도 모를 머리로 짠 옷을 걸쳐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뼛속까지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머리카락 재앙」중에서
누드남 B는 A와 마찬가지로, 접촉에 어떠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지, “다들 얼른 벗으라고!”라며 소리친 뒤에 두 팔을 벌리고 다른 승객들을 마구 만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접촉을 통해 탈의 충동이 전염되는지는 불분명했지만, 두 사람을 벗겨버린 전적은 무시할 수 없어서 이번에는 다들 소리를 지르며 죽을힘을 다해 좁은 차 안을 도망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누드남 A가 들어온 옆 차량 문에서 새롭게 등장한 60대 아주머니가 전열에 가세하자, 이제 사태는 수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나부와 나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