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육아 일기를 쓰지 않는 자의 육아 일기다. 이 이야기들은 당신을 향해 있지 않고 나를 향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이 책을 당신에게 바친다. 나를 통해 세상에 나왔으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당신에게. 언젠가 마음이 돌이킬 수 없을 것같이 구겨질 때, 당신 자신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것이 없어서 괴로울 때, 이 책을 펼치길. 여기 있는 마음들을 꼭꼭 씹어 삼키길. (…) 당신이 걸어가는 그 길, 당신의 모든 걸음, 그 모든 순간을 열렬히 응원하며.
--- p.8~9
사랑을 ‘얼마나’ 주는지가 아니라 ‘어떤’ 사랑을 줄 것인가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내가 주는 사랑은 어떤 색인지, 어떤 맛인지, 어떤 감각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래서 언젠가 적금을 타는 날이 왔을 때 나는 어떤 색과 어떤 맛을 느끼게 될까. 잠깐 상상해보았는데도 아찔하다. 나는 당당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자식과 함께 웃을 수 있을까? 오싹한 기분이 든다. 자식이란 존재는 무서운 거구나. 내가 낳은 아름답고 천진한 존재가 나를 비추는 가장 서늘한 거울이 되겠구나.
--- p.58~59
어머니와 통화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 온몸을 긁어대며 생각했다. 우리의 고통이 이어져 있구나. 이 고통이 어쩌면 저 작은 아이에게도 이어지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몹시 두렵고 외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결연해졌다. 이 고통을 말해야 한다. 연결된 우리 모두를 위해. (…) 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믿음. 아니, 분명한 확신. 이것이 너에게도 전달될 수 있게, 나는 끝나지 않을 이 이야기를 쓰고 또 말할 것이다.
--- p.72
유년 시절 내가 아버지에게서 종종 들은 말이 있다. “네 까짓 게 뭘 안다고 그러냐” “네 까짓 게 뭘 할 수 있냐”. 나는 그것을 “‘네까짓 게’의 저주”라 부른다. 저주는 구속력이 매우 강하다. 때문에 한번 저주에 물들고 나면 그것을 없애기는 매우 힘들다. 모든 동화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저주를 없애려면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야 한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운 좋게도 나는 30대에 들어 저주를 푸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나의 요술 할머니, 나의 요정, 나의 구원은 글쓰기였다.
--- p.94~95
이제 나는 말한다. 어, 못 해. 나는 그런 거 못 써. 내가 겪은 고통은 단 하나도 쉽지가 않아. 나는 내가 매일, 매순간 겪는 이 고통이 어째서 나에게만 찾아오는 것인지, 이해가 잘 안 돼. 나는 이 고통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어. 나는 나를 잘 모르겠어. 그래서 나는 그걸 써. 나는 나 자신을, 내가 겪는 고통을 기록함으로써 나를 찾아가고 있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에 반응하는지. 나는 왜 매일 아프고 매일 슬픈지, (…) 나는 여전히 불가해한 나를 알고 싶고, 내 고통을 정확히 직시하고 싶어. 나는 단지 그걸 기록하고 있어. 나는 그걸, 쓰는 사람으로 지금 여기에, 살아 있어.
--- p.148
나만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사랑은 슬픔을 너무 많이 품고 있는 말이라 생각했지. 네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네가 날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사랑 안에 슬픔 말고도 많은 것이 함께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단다. 내가 30년 넘게 살았어도 잘 몰랐던 것. 아니, 실은 어린 나는 알았지만 점점 잃어버렸던 것을 너는 알고 있는지도 몰라. 내 슬픔을 놀라움으로 바꾸는 너. 놀라운 너. 너는 너의 길을 걸어갈 거야. (…) 그렇게 멀리멀리 지치지 말고 가렴.
--- p.193
우리의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더 큰 흐름인 걸까. 끝을 모른다는 저 바다처럼. 이 조류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딸과 나, 딸인 나와 딸인 어머니, 우리 모두 이 흐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결국 이 사랑이 나를 구할 것이라는 것. 삶의 파도에 휩쓸린 나를 건져 올리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우리들의 사랑이리라.
--- p.250~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