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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40쪽 | 198g | 125*190*20mm
ISBN13 9791189467944
ISBN10 1189467941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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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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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사기컵은 아직 단단해서 끓는 물을 붓는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하얗게 끓어오르는 물만 붓는다

오래된 탁자 위에
오래된 주전자 그 옆에
오래된 컵

이제 다 오래되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문제들만이 남아 있다
--- 「티타임」 중에서

초록색 가죽 가방을 메고
여자가 지나간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니

이 집은 국수가 일품이다

네 말과는 약간 다른 구석
그 구석에 앉아
오래된 모서리들과 독대한다
--- 「테이블」 중에서

오늘 아침 눈을 뜨자 책상 위에 돌멩이 하나가 놓여 있다
흰 점 검은 점 얼룩얼룩한 돌멩이가

어제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돌멩이에게 말한다
다시 봄이 온 줄 모르겠다고 돌멩이에게 말한다
컵에 가득 차 있는 검은 커피에서 해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곧 밤이 올 것만 같다고 돌멩이에게 말한다
--- 「돌멩이」 중에서

몸통을 잃어버린 입처럼
악수가 오고 가고

흰 입김으로 가득찼다

몸이라는 고독이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므로
--- 「월요일」 중에서

닥치는 대로 숨 쉬었으므로
난 늙어버렸다

네가 잠들면
사랑이 시작되듯

나는 기대하지

아직 오지 않은 표정을
뜻밖의 전개를
--- 「배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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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상자 같은 방 안에서 정물이 되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신수형의 첫 시집은 완벽한 겨울 시집이다. 무거웠던 잎들을 다 떨어뜨린 채 앙상한 가지만으로 존재하는 겨울나무들처럼, 신수형의 시는 최소한의 언어만으로 백지를 채운다. 그는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컵이라면, 거기 “아무것도 넣지 않고/하얗게 끓어오르는 물만 붓는”(「티타임」) 식이다. 컵에 담긴 내용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면 할수록 섬세한 맛과 향이 느껴진다. “선명한 사실”이 되기 위해 “최소한의 동작만 하기로 한”(「타임캡슐」) 사람의 독백이 그의 시다. 그의 시집에는 “부동의 자세”(「무중력」)로 서서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는 사람이 산다. 그는 이 세계를 낯설어한다. 세상은 암호로 가득하다고 여긴다. 살아 있다는 게 뭔지, 오늘이 왜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에게 세계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무빙워크’와 같다. 그는 이 세계의 속도가 버겁다. 살아 있는 한 멈출 수도 내릴 수도 없는 무빙워크 위에서 ‘나’의 육체는 자주 증발한다. 투명해진다.

그러므로 이 시집을 읽는 일은 ‘존재의 소실’이라는 만만치 않은 사건과 대면하는 일이다. 마음을 다쳐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조금씩 피를 흘려보내는/밤의 압력 장치//피에 대해서라면/조금 말할 수 있어요”(「무중력」)라고 무심히 고백하는 사람. 너무 아파서 아픈 줄도 모르고 시간을 흘려보낸 뒤 “일요일이 지나자 모든 게 이해되었다” (「시차」)라고 뒤늦게 깨닫는 사람. 작은 상자 속의 작은 상자 같은 방 안에서 수시로 정물이 되는 당신이라면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이 시들이 얼마나 간절한 신호인지. 우리를 태운 시간의 무빙워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전진”(「무빙워크」)할 뿐. 그래도 신수형의 시집을 손에 들고 이 겨울을 통과할 수 있어 좋다. 나는 이 말을 자랑처럼 하고 있다. 그의 문장을 따라 읽는데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후드득 떨어진다. 마음속에서 고요한 소란이 일었다는 뜻. “나는 나의 유일한 장소이자/유일한 실물이므로//나와 상관없이 이어지는/그 어떤 지루한 전개에도 놀라서는 안 된다”(「잠기다」)라는 진술에 의지하여 걷다 보면 이 무빙워크가 조금은 빤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조금 더 걸어볼 힘이 난다. 시는 금세 끝나버렸지만 조금도 짧지 않은 여운이 이어진다.
- 안희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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