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고쳐볼 테니 이틀만 여유를 주세요.” 그랬죠. 그 이야기를 들은 부장님이 잠시 고민하더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저도 무슨 배짱으로 해보겠다고 한 건지 모르겠고, 부장님은 어떤 마음으로 허락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맡긴다는 게 말이 쉽지, 막상 실제 상황에서는 그런 결심하기가 쉽지 않아요. 만약 그렇게 일을 저질러놓고 못 고치면 이건 수습이 안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수리를 시작하자 지켜보던 일본인 기술자들이 충분히 고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는지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렇게 그 전동기를 우리가 고쳤습니다. 6개월 걸린다고 했는데, 딱 나흘 걸렸죠.”
--- p.18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고가 나면 사고 내용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사고 날짜, 시간, 일어난 이유까지. 또 어떤 부분이 문제였고, 어떻게 고쳤는지 등도 상세히 적었다. 사고 내용과 복구한 내용을 적으면서 설비 설명서를 찾아 설비 구조에 대해서도 번역해서 기록했다. 사소하다고 생각되건 중요하다고 생각되건, 무조건 기록했다.
--- p.35
한국에 돌아온 김차진 명장은 곧바로 아이디어를 현실에 적용해보았다. 도면을 그리고, 시뮬레이션도 하고, 마침내 실전 적용에 성공했다. 그 결과 2015년부터 이 방법으로 총 여섯 차례에 걸쳐 스테이브 쿨러 260매를 4고로 안쪽에 바꾸어 끼우는 데 성공했다. 철강 기술 선진국도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p.75
“정비인은 설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뛰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설비가 다시 건강한 가동음을 낼 때까지 책임지고 고쳐야 하는 의사입니다. 자신감도 있어야 하고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고장 난 설비가 수리를 거쳐 건강을 되찾고, 정상적인 가동음을 낼 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짜릿하게 전해지는 쾌감.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진짜 정비인입니다.”
--- p.108
남태규 명장은 동의할 수 없었다. ‘일본인이 한 것이 개선의 여지가 없는 최적의 해법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그들이나 우리나 영원히 미완성의 존재이고, 그러니까 그들 또한 자체적으로 끊임없이 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개선하고 검증하길 기다릴 게 아니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생각은 옳았다.
--- p.120
현장 직원들은 쓸데없이 시간만 일주일 날리는 거 아니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서광일 명장은 자신이 있었다. 현장의 반대가 워낙 심해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용기를 냈다. 그때 힘이 된 것은 그의 편에 서줬던 동료들이었다. 한번 결심하면 쉽게 물러서지 않는 서광일 명장의 스타일을 아는 팀장은 그의 아이디어를 수용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세상을 바꾸는 엉뚱하고 신선한 발상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엉뚱함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 p.132
4열연공장은 열연공장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기술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온전히 포스코 자체 기술만으로 지었다. 게다가 통상 짓고 나서 반 년, 길게는 일 년 걸리는 조업 안정화를 석 달 만에 이루어냈다. 일본 엔지니어링 회사의 기술자들이 지원해주던 이 작업을 우리 손으로, 그것도 통상적인 기간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해낸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설비 능력 350만 톤을 훌쩍 웃도는 420만 톤의 생산 능력까지 확보했다는 점이다.
--- p.150
“모두가 무모하다고 했지요. 설비 메이커도 두 손을 들고 안 된다고 하고, 밸브 교체만이 답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래도 전 명확한 이론과 밸브의 구조적 특성을 알고 있었고, 밸브의 동작 범위를 바꾸고 별도의 제어 로직을 구성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로 밀어붙였지요.”
--- p.166
그는 자신의 좌우명으로 ‘끈기’와 ‘성실’을 꼽았다. 한번은 설비 개선 중 거듭 실패하자 선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가 일본에 뒤져 있는 것은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그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해당하지 않는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근성이 있기 때문이다. “제 근성도 중요하지만, 조직 분위기도 중요하죠. 그런 면에서 포스코의 조직 문화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실패를 용인할 뿐만 아니라, 더 해보라고 부추기는 문화거든요. 선배의 이야기도 실패를 책망하는 게 아니잖아요. 실패 때문에 주저앉을까 봐, 주저앉지 말고 계속 도전하라는 독려였으니까요. 저는 이러한 조직 문화 덕을 많이 봤어요.”
--- p.252
“주자가 한 말 중에 소불근학 노후회(少不勤學 老後悔)라는 말이 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하게 된다는 뜻인데요. 이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그나마 제가 명장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공부여서 이런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합니다.”
--- p.267
“이걸 꼭 사람이 이런 식으로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크레인이 롤을 수평으로 끌어내지 못한다면, 롤을 그대로 두고 케이스를 벗겨내서 크레인은 롤을 들어올리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허탈하리만큼 간단히 해결되더라고요. 이걸 사람이 할 때는 2~3시간 동안 진땀을 빼야 했는데, 지금은 10분이면 뚝딱 해치울 수 있게 됐습니다.” 달걀을 깨서 테이블에 세운 콜럼버스의 기발함, 칼로 싹둑 잘라서 꼬인 매듭을 풀어낸 알렉산더 대왕의 신박함과 비슷했다. 늘 보는 시각에서만 보기를 거부하고 고개를 돌려 다른 각도에서 봄으로써 문제 해결책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의 개선안은 간단하지만, 아니 간단해서 더욱 놀랍고,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 p.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