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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날리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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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2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30*200*20mm
ISBN13 9791193710005
ISBN10 119371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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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청년 하나가 허벅지 관통상을 당한 채 돌아왔다. 멍석이 펼쳐진 달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앉혀놓고 귀를 기울였다. 들쥐처럼 잘 숨고 족제비처럼 날래다는 베트콩과의 전투 무용담에 나는 모기에 뜯기는 줄도 몰랐다.
---「연 날리는 소녀」중에서

나치 군대나, 소련의 붉은 군대나, 극악한 일본군이나. 인민군이나 광주에 투입되었던 계엄군이나, 세계 곳곳에 주둔한 미군이나 군인은 다 똑같아. 살상을 저지르는 악마의 속성을 가진 집단이지. 좋은 군대가 어디에 있어? 선한 전쟁도 절대 없는 것이야.
---「연 날리는 소녀」중에서

박물관 안에는 미군이 사용했던 포탄과 그 파편들, 각종 중화기와 총기들, 베트콩이 애용하던 AK47 소총과 조잡한 수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지뢰와 폭격기의 대형 포탄을 보고 있노라니 훅하는 섬뜩함에 더위를 잊었다. 저런 무기들이 발사될 때마다 육신이 산산조각이 나고 영혼이 곤두박질했을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몸서리쳐지며 소름이 온몸에 번졌다.
---「연 날리는 소녀」중에서

노인들이 움켜쥔 성조기에 짐승의 형상이 펄럭이고 있음을 민철은 새삼 깨달았다. 성조기 위쪽에 그려진 네모난 박스는 먹이를 빨아들이는 주둥이로, 그 안에 가지런히 박힌 별들은 촘촘한 이빨로, 붉은색의 줄무늬는 피를 가득 머금은 내장처럼 보였다.
---「회리바람 타는 닭」중에서

목 잘린 닭보다 더 참담한 동강난 역사를, 그 처절한 통곡을, 무지막지한 외세의 칼날에 식민지가 되고 토막난 비극을, 동족끼리 죽고 죽이면서 이어온 피 흘린 죄악상을 인식하며 한숨과 통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한몸으로 다시 붙고자 열망하는 민족혼의 날갯짓을 느꼈다.
---「회리바람 타는 닭」중에서

회리바람 꼭대기에는 닭의 형상을 띤 수많은 영체들이 소용돌이치며 맴돌았다. 제주도 다랑쉬굴에서 왔다는 아저씨들, 여수와 순천을 떠돌다 왔다는 평범한 아주머니들, 고양시 금정굴에서 울다 왔다는 예쁜 새댁들, 대전 산내동 출신의 앳된 청년들, 구슬을 들고 있는 아산의 아이들, 비녀를 꽂고 있는 홍성의 할머니들, 지게를 지고 있는 서산의 농부들, 전국 여기저기서 왔다는 수천, 수만의 형체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들의 울부짖음이 지상을 휩쓰는 회리바람과 천둥소리로 들렸다.
---「회리바람 타는 닭」중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며 눈을 감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개는 고추를 물어뜯는다는 할머니의 말이 번쩍 스쳤다. 얼굴을 가렸던 손을 재빨리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있는 힘을 다해 고추를 감쌌다. 얼굴이 갈기갈기 찢겨도 거기는 지켜야 했다.
---「개와 걔」중에서

“어? 이상혀. 오늘은 왜 점박이가 도망혀?”
“그러게. 걔가 개를 이겼나보네. 날도 더운디 볼 게 없네 그려.”
“저 녀석, 개 성격을 파악했구먼. 등 뵈면 쫓아오고 맞서면 꼬랑지 내리는 승질을 알았나베. 긍께 저리 뎀비지.”
---「개와 걔」중에서

인생이 막힐 때마다 유년의 경험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곤 했지. 고향 언덕을 찾아가야겠어. 그 언덕에 서면 점박이를 굴복시켰던 추억이 신화처럼 되살아나지. 개같은 시대를 끝장낼 번득이는 지혜가 떠오를 것이야. 개판을 깽판낼 담력도 솟아날 것이고. 그나저나 내 속의 개부터 후려쳐내야겠어. 개판 세상과 치열하게 싸울 내 노년이 그려지자, 온몸의 핏줄이 흥분하며 벌떡였다. 점박이에게 맞서던 소년의 심장처럼 둥둥둥.
---「개와 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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