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현대미술 또는 중국 모던 미술이란 무엇인가? 21세기 들어, 초고층 빌딩이 중국 주요 도시들에 들어서는 한편 중국 또한 국제 미술계의 일원이 되었다. 국제 지향적인 중국 예술가들 다수는 비디오, 디지털 사진, 설치 예술, 퍼포먼스 분야에서 작업하며 새로운 기술이 제공하는 잠재력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다. 어떤 예술가들은 여전히 종이에 수묵이나 목판화, 캔버스에 유채, 대나무와 철 등 오래되고 전통적인 재료와 매체를 실험한다. 그러나 대다수 예술가들의 경우, 보편-국제-세계-중심-현재적인 것과의 예술적 연결은 그 반대항을 이루는 개인-민족-지역-주변-과거적인 것과의 연결에 의해 견제되면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정체성들 사이의 긴장은 단순한 양극성을 타파하고 개별 예술가들을 그물처럼 엉켜있는 미적·사회적·경제적 힘들에 노출시킨다. 이 그물 안에 있는 어떤 가닥이 중국 근현대미술을 ‘모던하게’ 만드는가? 또한 어떤 가닥이 중국 근현대미술을 ‘중국적으로’ 만드는가?
---「서론」중에서
예술, 문화, 경제, 정치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중국은 언제 ‘모던’ 시대에 진입했을까? 언제, 그리고 어떻게 중국의 미술이 모던해졌는가? ‘모던(modern)’이라는 용어의 다양한 정의 가운데 무엇을 택하느냐에 따라 이 질문에 달리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인쇄술의 보급과 높아진 문자해독력, 고도로 상업화된 사회, 대륙 간 해상무역의 전개 등 모더니티의 전조라고 여겨지는 몇 가지 현상들은 이미 중국 명나라(1368-1644) 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일련의 국내외 사건들을 겪으면서 중국은 자국이 아니라 타국의 방식으로 ‘모던’의 길을 걷고 있는 전 세계와 직면했다. 특히 조약항(條約港)의 개항은 중국 문화와 경제 발전을 자연스레 촉진했고 이들 개항 도시에서 상업이 신속하고도 극적으로 발전했다.
---「1장 제국주의 시대 중국 미술: 아편전쟁에서 시모노세키 조약까지 1842-1895」중에서
20세기 중국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서양화법을 도입한 것이었다. ‘서양화(西洋畵’란 소묘, 수채화, 구아슈(gouache), 유화를 이르는 말로, 과거에는 신기하고 이국적으로 인식되었지만 20세기 초엽에는 기능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청나라 쇠퇴기에 새로운 교육체계가 구축되고 근대적 형태의 미술교육이 발달하면서 미술의 목적과 의미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차차 다루겠지만, 유화는 이 새로운 제도의 지원에 힘입어 주류에 편입되었으며 곧 필수 요소가 되었다. 제2장에서는 20세기 초 중국 예술가들이 세계 보편의 문화형식에 관여하면서 펼쳐 보였던 다양한 양상의 제도적 기원을 탐구한다.
---「2장 새로운 국가의 탄생과 미술」중에서
1928년 옛 남쪽 수도 난징에 새 정부가 수립되면서, 1910년대와 1920년대에 끊임없이 이어지던 군사분쟁이 종결되었다. 군벌시대가 종말을 맞으면서 낙관주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식인과 정치인들 사이에 퍼져나간 중국 문화의 새로운 번영과 세계에도 통할 중국 예술의 창조에 대한 야심 찬 꿈도 함께였다. 한동안 개인과 국가의 관심은 어떻게 중국을 더 좋은 나라로 발전시키고 국제사회에서도 존경받는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할지 그 전망에 집중되었다. 민간이 주도하는 계획은 공적 지원을 받았고, 공공사업은 민간 기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1930년대의 예술가들은 개인으로서 창조적인 열망을 가지면서도 사회와 국가의 요구에 의무감을 가졌다. 이에 따라 수묵화가들의 애국심도 문화적 민족주의로 나타났다.
---「5장 1930년대 국화의 황금시대」중에서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시안에서 수하에 있던 장군 두 명에게 납치되는 일이 벌어졌다. (중략) 다음 해 여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 전쟁이 8년이나 지속되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고서야 중국 해안 중심지에 대한 일본 점령이 끝나게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중략) 예술가들은 서부의 장제스 국민당 정부, 산시 북부의 공산당, 해안 지역의 왕징웨이 괴뢰정부, 이 셋 중 하나의 통치 아래 살았다. 국운이 다할지 모른다는 위협 아래서도 예술가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 예술의 목적을 되짚으며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국가의 비극을 개인의 관심사보다 우선했다. 도회적 모더니즘 운동의 야망이나 새로운 국화(國畵, 중국수묵채색화) 그룹이 보이던 낙관주의, 모더니즘 판화가들의 혁명에 대한 열정은 하나의 대중적 면모로 대체되었다. 이제 예술은 문화와 나라의 존속에 대한 우려를 반영했다.
---「6장 전시(戰時) 미술」중에서
농민군으로 도시들을 포위하여 점차 목을 조르려던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은 1949년 1월 31일 베이징이 인민해방군에 평화적으로 항복하며 성공을 이루었다.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몇 달 동안, 예술학교의 지하당원들은 반란에 대한 지원을 조용히 강화해온 터였다. 베이핑국립예술전과학교의 학생 허우이민(候一民, 1930-2023)은 교수들로부터 도움을 얻어 평화를 찬양하고 해방군을 환영하는 전단지를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 제작했다. 국민당 정부가 대학 교수들을 대만으로 대피시킬 준비에 나섰지만, 미술과 교수들은 대부분 떠나지 않고 중국 내에 남았다.
---「7장 마오쩌둥 시대 서양식 미술」중에서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의 지시 아래 공식적으로 시작되어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끝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약칭 ‘문혁’)은 중국 예술에 영구적이고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문화대혁명은 여러 면에서 대단히 파괴적이었다. 10년 동안 마오주의 예술 경향을 강화했으며, 이후 정책이 바뀐 뒤에도 존속하는 시각적 유산을 만들어냈다. 이 시기는 누가 생산자인지에 따라 두 부류의 기간으로 나뉜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지속된 제1기는 ‘홍위병(紅衛兵)’ 미술로, 1970년부터 1976년까지 이어진 제2기는 ‘공농병(工農兵)’ 미술로 정의된다.
---「9장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과 미술」중에서
1979년 미술계에서 유망한 실험들이 꽃을 피웠지만, 고착화된 예술 관료주의는 그 권한과 취향을 앞세워 예술 혁신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지지가 필요한 당내 강경파를 달래기 위한 상징적 몸짓으로 1982년과 1983년에 ‘정신오염’ 반대 이념운동을 지지했다. (중략) 1983년과 1984년에 덩샤오핑은 지각변동에 가까울 만큼 사회와 이념에 충격을 초래할 경제정책의 변화를 도입했다. 공산주의 경제 개념을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작업 단위가 더 이상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략) 반정신오염운동에 따른 문화적 위축, 경제개혁, 외부로의 개방은 모순된 사고방식을 낳았다.
---「10장 마오쩌둥 시대 이후의 미술」중에서
20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과 국민당이 통치하던 대만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1949년 두 지역은 중국의 새로운 공산당 정부를 피해 탈출한 난민 물결로 사회는 물론 기반시설에 큰 부담을 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문화와 예술에서 발전도 함께 이루었다. 1949년에서 1979년 사이, 중국과 관계가 단절되거나 제한되었던 30년 동안 홍콩과 대만의 예술은 본토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발전했다. 이에 따라 중국이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본토 예술가들이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곳은 이 두 가지 대안적 중화 문화였다.
---「11장 또 다른 중화」중에서
1989년 6월 4일 벌어진 천안문 사태는 중국 정치사에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6·4 천안문 사태는 중국 미술과 미술가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천안문 사태 직후부터 강력한 정치적 압력을 받게 되면서 중국 미술계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미술사학자 프란체스카 달 라고(Francesca dal Lago)는 이 시기를 두고 “거의 10년간의 문화적 도취”에서 “깨어나는” 기간이라 묘사했다.01 중국공산당의 강경파 이론가들은 ’85신조와 그 운동이 절정에 다다른 1989년 2월 《중국현대예술전(中國現代藝術展, China/Avant-Garde)》이 천안문 사태로 이어진 이데올로기적 일탈에 일부 기여했다고 공격하며 개혁개방 국면을 전환하려 했다.
---「12장 유턴은 없다, 1989년 이후 중국 미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