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많은 시간을 비기독교적 환경 한가운데서 홀로 지내야 합니다. 이 시간은 검증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의 묵상 시간이 참된지, 우리의 공동체가 참된지 시험해 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공동체가 각 개인을 자유롭고 강하며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이바지했습니까, 아니면 비자립적이고 의존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까? 공동체는 그가 다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잠시 손을 잡아 주었습니까, 아니면 그를 두려움 많고 불안해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까?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생활 공동체에 제기되는 가장 심각하면서도 중대한 질문입니다. ……묵상 시간이 그로 하여금 일상생활로 돌아오면 곧 사라지고 말 영적 황홀경 상태에 잠시 빠져 있게 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선명하고 아주 깊이 드리워져, 하나님의 말씀이 온종일 그를 붙들어 주고 강하게 만들어, 그로 하여금 사랑을 행하고 순종하며 선행을 하도록 만들었습니까? 오직 그날 하루만이 여기에 대해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p.143-145, 「『성도의 공동생활』 3장 “홀로 있는 날"」 중에서
죄 고백 속에서 십자가로 가는 돌파가 이루어집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길 원하며, 나는 나에 대한 권리가 있고, 나의 미움이나 욕망에 대해, 나의 삶과 죽음에 대해 내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인간의 영과 육은 교만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바로 그의 죄악 속에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 앞에서 행하는 죄 고백은 가장 깊은 겸손입니다. 죄 고백은 나를 아프게 하며 작아지게 만듭니다. 죄 고백은 교만을 무섭게 쳐서 무너뜨립니다. 형제 앞에서 죄인으로 서는 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치욕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옛사람은 형제의 눈앞에서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치욕스러운 낮아짐이 너무 힘들어서, 우리는 형제 앞에서의 죄 고백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거듭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의 눈이 너무나도 어두워져 있기에, 그러한 낮아짐 속에 있는 약속과 영광을 더는 바라보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 p.189-190, 「『성도의 공동생활』 5장 “죄 고백과 성찬"」 중에서
값싼 은혜란 투매(投賣) 상품인 은혜, 헐값에 팔리는 용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 …… 값싼 은혜는 실로 우리 대다수에게 무자비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지 않고 도리어 차단하기만 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를 따르라고 부르기는커녕 우리를 둔하게 만들어 불순종하게 했다. …… 은혜가 값비싼 것은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멍에를 씌우기 때문이고, 그것이 은혜인 것은 예수께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따르기가 없는 그리스도교에 지나지 않고, 따르기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교에 지나지 않는다. …… 세상이 지금보다 더 끔찍하게, 지금보다 더 절망적으로 기독교 세상이 된 적이 있었는가? …… 값싼 은혜는 우리 개신교회에 대단히 무자비했다.
--- p.29-49, 「『나를 따르라』 “값비싼 은혜"」 중에서
믿음을 갖게 하는 상황과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 경우에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첫째, 상황 자체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만이 어떤 상황을, 믿음을 갖게 하는 상황으로 규정한다. 둘째, 믿음을 갖게 하는 상황은 결코 인간이 조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르겠다는 제안은 결코 따르기가 아니다. 부르심만이 상황을 조성한다. 셋째, 이 상황 자체는 어떤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다. 부르심을 통해서만 그 상황은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마지막으로, 특히 믿음에 이르게 하는 상황 자체도 언제나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믿음에 이르게 하는 상황이란 개념은 다음의 두 명제, 똑같이 참된 두 명제를 유효하게 하는 사태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믿는 사람만이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
--- p.64-65,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 중에서
후고 볼프(Hugo Wolf)의 아름다운 성가가 자주 떠오르는군요. 최근에 우리가 여러 차례 불렀던 노래지요. “갑자기, 느닷없이, 기쁨과 슬픔은 찾아오지. 그대가 짐작도 하기 전에, 그 둘은 그대를 떠나, 주님께로 가지. 그대가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뢰려고.” 모든 것이 이 “어떻게”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외적 형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어떻게”입니다. 이따금 미래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우리를 완전히 진정시켜 주는 것도 이 “어떻게”입니다. 부모님께서 날마다 저를 위해 주시고, 저를 위해 움직여 주시고, 저를 위해 고생해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R.12은 정말 완벽하고 기쁜 결혼식을 올리겠지요. 저는 이곳에서도 그 신부와 함께 참으로 기뻐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 p.59, 「『옥중서신-저항과 복종』 “1943년 4월 5일 편지"」 중에서
나에 관해 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해야겠네. 나는 부활절 이후에야 이곳에서 풀려날 것 같네. (…) 나의 지나친 신중함―자네는 그것을 보고 종종 나를 놀려 대곤 했지. 우리가 함께했던 여행을 떠올리며 하는 말이네―은 시민 생활의 부정적인 면, 다시 말해 일종의 불신앙이 아닐까 싶네. 그것은 안전이 보장된 시기에는 숨어 있다가 불안정한 시기에 나타나지. 게다가 그것은 “불안”의 형태로 나타나네. 자명하고 명백한 행위 앞에서 품는 불안과 불가피한 결정들을 감수하는 것 앞에서 품는 불안 말일세. 내가 말하는 “불안”은 “비겁함”이 아니네. (“불안”은 비겁함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만용의 형태로도 나타나지) 나는 이곳에서 “운명”에 대한 불가피한 저항과 불가피한 복종 사이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자주 생각하네.
--- p.214, 「『옥중서신-저항과 복종』 “1944년 2월 21일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