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히브리 민족은 넘실거리는 홍해와 그 속에 수장된 이집트 군사들을 뒤로 한 채, 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광야에의 여정을 시작했다. 당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두 개의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홍해의 광야 길’이었다(출13:18~18). 두 길 중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가면 며칠이 되지 않아 약속의 땅에 당도할 수 있었고, ‘홍해의 광야 길’은 멀리 돌아가는 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광야 길이었기 때문에 실은 절대로 선택해서는 안 되는 길이었다.
--- p.36, 「출애굽기」 중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 또한, 이스라엘이 그토록 불신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을 거쳐 결국은 문자 그대로 성취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을 번복하신다 한들 그 누구도 그분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약속에 제약을 두시고 역사 속에서 끝내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 그것이 성경이 줄곧 강조하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사무엘하 7장 이후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과연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 가를 관심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과연 수많은 역사의 부침浮沈†속에 어떻게 다윗의 왕위를 보전하실 것인가? 이와 동시에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보다 근원적인 약속은 또 어떻게 성취해 가실 것인가?
--- p.129, 「사무엘하」 중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행적에 대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데, 일단 엘리야는 모세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 첫 번째는, 모세는 영웅 행세를 하다 광야로 도망하여 훗날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출3장). 그리고 엘리야 또한 그와 유사하게 사역에 지쳐 도망하다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왕상19장). 두 번째는,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다가 근처 모압 땅에서 숨을 거두었고, 엘리야 역시 가나안 근처의 길갈에서 최후를 맞는다(왕하2:1). 마지막 세 번째는, 신34:6에 모세가 죽고 난 뒤 그의 흔적은 누구도 찾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엘리야 또한 하늘로 승천함으로써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왕하2:11).
--- p.151, 「열왕기하」 중에서
가나안의 토속신 바알, 아람의 신 하닷, 요단 동편 모압과 암몬의 신 그모스 혹은 밀곰, 블레셋의 다곤 등 이들은 하나 같이 고등 종교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할 만큼 탐욕적이고 음란한, 약자들에게 한없이 잔인한 신들이었다. 이스라엘은 욕망에 눈이 멀어 여호와보다 그런 신들을 섬기기에 바빴지만, 다만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예언을 들을 귀라도 있었다면, 누구든 “주와 같은 신이 또 어디에 있으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덧 BC 8세기 선지자들 중 마지막 선지자인 미가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차례이다. 미가의 이름은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7:18).”라는 뜻으로, 미가서를 읽는 내내 그 이름과 같은 경이와 찬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p.211, 「미가」 중에서
아가서를 묵상할 때는 적잖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한 남녀의 연애와 결혼을 ‘뮤지컬 형식’으로 그려 내기 때문이다. 남녀 주인공이 번갈아 노래를 하고, 그들 뒤에서는 ‘여자’와 ‘남자’로 구성된 ‘합창단(다양하게 구성)’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가 곧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총7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막의 배경은 ‘결혼식’이다. 스토리 구조는 연역적이다. 구태의연하다고는 해도 결국 사랑의 절정은 결혼식이 아니겠는가.
--- p.351, 「아가」 중에서
요엘서는 무시무시한 메뚜기 재앙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혹자는 요엘 1장의 메뚜기 재앙을 비유로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재앙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또 일반적으로 예언서에서 메뚜기를 비유로 사용할 때는 “…메뚜기 같고”와 같은 직유법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나3:15,17, 렘51:27, 사40:22 등). 고로 1장에서 묘사되는 메뚜기 재앙은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 p.420, 「요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