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암다실과는 달리 넓고 크며 호사스러운 다실이 있는데, 그것을 서원다실이라고 한다. 서원(書院)이란 서재를 겸한 거실의 중국식 호칭이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에는 집을 지을 때 침실을 위주로 한 귀족의 주택양식이 중심이었던 반면,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의 무사계급은 서재를 겸한 거실인 이 서원을 위주로 한 주택양식을 선호하였다. 이런 서원 건축양식이 소위 일본식 주택양식의 전형이 되는데, 여기에서 서원다실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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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는 눈 오는 날 다회를 하는 경우, 손님이 눈 쌓인 징검돌을 밟고 다실로 들어올 때, 징검돌에 발자국이 남는 것을 싫어해서 징검돌 윗부분만은 물로 살짝 씻어 발자국을 없애도록 했다고 한다(『남방록』). 로지는 청정한 장소여야 하므로 징검돌도 청정해야 해서, 리큐로서는 발자국으로 징검돌이 더럽혀지는 것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징검돌이 청정하다는 것은, 그가 이를 단순히 돌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비록 징검돌의 용도가 발로 밟는 것이라 해도 돌 그 자체는 청정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으면 마음과 통하는 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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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는 도코노마의 천장 높이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몇 촌(寸: cm) 몇 분(分: mm)의 단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다. 족자를 돋보이도록 거는 데는 천장 높이가 결정적이므로, 작은 ‘분(分)’의 차이까지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다. 명품인 족자가 있어 도코노마가 제대로 모습을 갖춘다고 본다면, 그 족자의 길이에 맞춰 도코노마의 천장 높이를 조절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보통의 사고로는 천장의 높이에 맞춰 족자 크기를 표구하는데, 리큐는 거꾸로 족자에 천장의 높이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도코노마가 있어서 족자를 거는 것이 아니라, 걸 만한 족자가 있기 때문에 도코노마를 만든다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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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적에 대응하는 것으로 묵화가 있는데, 똑같이 먹의 아름다움이 거론되었어도 소헨에 이르러 묵화도 배척했다는 것은 한층 더 이런 인식이 심화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족자가 리큐가 밝히는 것처럼 주객 모두 ‘다도 삼매의 경지에서 일심득도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소헨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족자는 문구(文句)에도 그리고 그 문구를 쓴 사람의 덕에도 존경할 수 있는 성스러움이 있어서 비로소 ‘일심득도의 물건’이 되는 것이므로, 아무리 송·원 시대 명화라고 해도 단지 뛰어난 그림이라는 것만으로는 정성을 다한 한마음[一心]으로 부지런히 덕을 쌓고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得道]하려는 수행을 위한 족자가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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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가 ‘다도 원래 득도의 장소’라고 한 한마디는, 다도가 득도라는 깨달음의 경험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리큐의 다도를 평해서 세간에서는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하는데, 그 일미(一味)는 단순한 일체가 아니라, 다도의 본뜻이 이 득도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도가 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선일미라고 한다면 리큐의 다도를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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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비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다도는 성립될 수 없다.”라고 『장암당기(長闇堂記)』224에도 적혀 있는데, 와비의 마음이 갖춰져야 와비가 드러나는 것으로, 리큐는 그 와비의 마음을 자유롭게 부린 사람이며 그 점에야말로 리큐의 와비차의 본질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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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도 분명히 불법으로 수행 득도하는 차의 중요성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선차록』처럼 도구의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좋고 나쁨을 가려 소위 기물을 잘 사용함으로써 마음의 자유를 즐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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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정신주의를 주창한 또 한 사람으로 마츠에(松江)의 영주 마츠타이라 후마이(松平不昧)를 들 수 있다. 후마이는 「췌언(贅言)」에서 「차 솥 하나 있으면 다도는 되는 것을, 수많은 도구를 애호하는 허망함」, 「다도란 다만 물을 끓여 차를 타서 마시면 된다는 근본을 알아야 한다」라는 리큐의 노래 두 수를 인용하며, 만약 이 노래의 뜻처럼 다도가 행해진다면 차는 세상의 조롱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후마이는 이 노래를 인용하여 첫 노래에서는 도구차를 경고하였으며, 두 번째 노래에서는 ‘근본을 알아야 한다’는 그 근본이 바로 도(道)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차 솥 하나라고 한 것은 아마 아와타 구찌젠보(주212, 참조)가 손잡이가 있는 차 솥 하나로 차를 끓였다는 것에서 가져온 말로서, 와비차는 차 솥 하나면 충분하다는 취지를 이야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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