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짓을 인간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짓을 할 만한 자는 딱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아 서영은 덜덜 떨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뱀……파이어.” ---p.13
“꽃잎은 핏빛보다 붉고, 그 향기는 어떤 뱀파이어라도 유혹할 만큼 향기롭다. 그 꽃을 조금만 맛보면 어떤 상처라도 치유되고, 그 꽃을 가지면 뱀파이어들의 위에 군림하게 된다.” ---p.28
『이제 그만 받아들이는 것이 어때?』
남자의 말에 정신이 든 건지, 그제야 루이는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여 남자를 노려봤다.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력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루이의 모습에 남자는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웃었다.
『그렇게 거부한다고, 거부할 수 있을 거 같아?』
“닥쳐!” ---p.54
5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자신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에 짜증이 난 루이는 인상을 구겼다. 보통 유년기의 뱀파이어가 성년식을 치르는 나이는 600살 전후. 미처 다 깨어나지 않고 몸에 잠들어 있던 힘이 깨어나면서 작은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뱀파이어들은 성년식이라는 것을 치르고 힘을 담을 육체를 키운다. 그것이 뱀파이어의 성년식이었다. 아직 루이는 500살 초반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루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p.57
“새파랗게 어린놈이……! 지금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이런, 새파랗게 어린놈보다 힘 약한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줬건만 상대는 그 예의를 걷어차버렸다. 그렇다면 굳이 자신이 그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루이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을 놓았다. 그러자 아쉘이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이를 갈기 시작했다.
“뭣이!”
“나는, 그날의 일을 저지른 범인을 당신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걸 잊지 마.” ---p.60
“이런! 루베르이 경,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지 마세요. 거긴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인 독이 발려 있으니까요. 그 독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지금 당장 움직이기는 힘들 겁니다.”
“……너는…… 누구…….”
루이의 말투가 점점 어눌하게 변했다. 루이는 자신이 이렇게 당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검은 복면을 쓴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p.103
서영은 루이의 말에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작은 소년이 너무 귀여워 꽉 안아주고 싶었다. 로리콤, 아니 쇼타콘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서영은 그를 안고 싶다는 생각에 그를 빤히 쳐다봤고, 루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붉은 눈에 그녀를 가득 담는 순간,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면서 서영은 그대로 그를 끌어안았다.
“뭐…… 하는 거지?” ---p.144
15년 전에 로드가 갑작스럽게 소멸하고, 그를 보좌하던 7인 또한 소멸했다. 뱀파이어 사회는 2천 년 넘게 자신들을 이끌던 수장이 사라지자 곧 혼란스러워졌다. 누군가 제어해주지 않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구 날뛰는 뱀파이어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제어하기 위해 급히 소집된 것이 의회였다. 로드가 죽기 전에 인간들이 꽃을 가져갔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꽃의 존재를 아는 뱀파이어들은 모두 입을 모아 인간들과의 전쟁을 원했다. ---p.165
달빛을 등지고 서 있는 남자는 달빛을 흡수한 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거기다 남자의 등에 커다란 검은 날개가 펄럭이자 그 날개에 달빛이 반사되어 마치 사방으로 은빛의 반짝이는 가루가 뿌려지는 것 같았다. 황홀하면서도 마치 요정이 등장한 것처럼 신비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자, 서영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p.169
“저기 붉은색으로 빛나는 이름들이 보이나?”
지스는 벽 한쪽에서 붉게 빛나는 이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이는 지스 경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봤다.
“저 붉은 이름들은 전부 뱀파이어의 신부가 된 인간들의 이름이네.”
“신부가 된 인간들의 이름?” ---p.21
“꽃이, 뱀파이어 꽃이 나타났습니다!”
“뭐?”
소년의 말에 세 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한 명은 루이, 또 한 명은 주방에 숨어 있던 백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아칸이었다.
“뱀파이어 꽃이라니 대체…….”
아칸은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소년은 분명 자신 대신 서영을 지키라고 놔둔 자였다. 그런 그가 뱀파이어 꽃을 봤다면, 뱀파이어 꽃이 서영에게 갔다는 소리인데…….
“도대체 왜?”
뱀파이어 꽃이 평범한 인간인 서영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그런데 뱀파이어 꽃이…… 서영 님을 납치했습니다!” ---p.69~70
“뱀파이어 꽃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복면 쓴 남자의 말에 로브 쓴 남자가 문을 열다가 살짝 멈칫했다. 그러더니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주한 우리 꽃님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던가?” ---p.112
금색의 줄을 잡아당기자 커튼이 천천히 걷어졌다. 드러난 벽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초상화의 주인은 붉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당신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남자는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초상화를 보며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 그림을 어루만지며 그곳에 자신의 몸을 바싹 붙였다.
“곧 다시 만날 겁니다. 나의 우상.” ---p.115
원탁의 탁자. 그 주위를 에워싸고 앉아 있는 12명의 뱀파이어. 어둠에서도 찬란하게 빛이 나는 붉은 눈동자.
“루베르이 경의 결혼 건에 대해 찬성하는 자는 손을 들게.”
아쉘의 말에 뱀파이어들은 하나 둘씩 손을 들었다. 12명의 뱀파이어 중 손을 든 자는 총 6명. 의회를 구성하는 뱀파이어 중 절반이 이번 청혼 건에 동의를 한다고 손을 들었다. 찬성하는 자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아쉘은 루이가 손을 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베르이 경, 자네는 이 결혼을 반대한다는 겐가?” ---p.215
“뱀파이어가 어떻게 신부를 맞이하는지 알고 있어?”
루이가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의 숨결이 확 느껴진다. 간질하면서도 야릇한 기분에 서영이 몸을 살짝 떨자, 루이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웃음소리에 귀가 간질거린다. 누군가의 숨결에 이렇게 마음이 들뜰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한 서영은 두 손을 꽉 움켜쥐며 옅은 숨을 뱉었다.
“신부가 될 자의 피를 입술에 바른 다음…….” ---p.309
루이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에 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거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루이는 확실하게 이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건…….”
이미 멸망해버린 일족의 눈동자로 만든 반지는 인간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루이는 이 반지가 자신이 서영에게 준 반지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pp.483~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