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에는 보르헤스가, 칠레에는 아옌데가, 페루에는 바르가스 요사가, 콜롬비아에는 마르케스가 있어서 비록 한 번도 그 땅에 대한 실제 경험이 없었어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고난받고 무엇으로 가슴 뜨거워지는지 짐작하는 바 있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에 대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차베스라는 이름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럴 리가 있겠는가. 차베스를 빼놓고 이야기한다면 진실이 아니지만, 차베스만 가득한 이야기도 진실이 아닌 것, 그것이 베네수엘라의 수도, 남미 최대의 메트로폴리스 중 한 곳인 카라카스의 프로필이었다.
---「프롤로그 ― 작동하지 않는 도시」중에서
세뇨라, 맨홀 뚜껑이 바예아리바 꼭대기부터 저 아래쪽까지 굴러가는 것 봤어요? 바예아리바 대로에 뚜껑 열린 맨홀이 몇 개나 되게요? 그 맨홀 하나에 누군가 커다란 나뭇가지를 꽂아놓지 않았겠어요? 그냥 보통 팔뚝만한 나뭇가지가 아니라 가로수를 통째로 뽑아다 꽂아놓은 것 같다니까요. 맨홀 뚜껑 가져다 팔면 돈을 좀 받나봐요. 지나던 차가 큰 구멍을 미처 못 보고 그 위로 지나가거나 하면, 하필 차 바퀴가 좀 작은 편이거나 바람이 시원찮게 들어 있거나 하면 정말 큰일나지 않겠어요? 밤에는 특히 더 그렇고요. 그래서 나무를 뽑아다 그냥 맨홀에 심어버리는 거예요. 알아보고 피하라고요.
---「페타레의 율레이시」중에서
“헤이, 보라쵸, 주정뱅이.” 주정뱅이들은 쉬지도 않고 춤을 추었다. 제한 급수로 속시원히 몸을 씻어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한, 생활고 때문에 공공재산인 구리 케이블(전깃줄, 인터넷 선 등등)을 몰래 끊어다가 파는, 항생제를 구하러 열흘째 시내의 약국이란 약국은 다 뒤지고 있는, 또 현금 인출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너 시간씩 줄을 서는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는 모두가 이 시간만큼은 오로지 럼과 메렝게에 의지한다. 버티고 견디는 고단한 삶이 곳곳에 있다. 다른 방도가 없는 일을 마주했을 때 사태를 낙관하여 불안을 잠재우는 데에 익숙한 이들이다. 럼주에 달뜬 이들이 메렝게를 흔들자 정원은 이내 유쾌하고 나른한 기운으로 충만해졌다.
---「아시엔다 산타 테레사」중에서
승강기가 움직이지 않으니 건물이 몇 층이건 걸어 다니는 것이 당연했고 대개 승강기가 있는 복도는 따로 창이 없어 어둠이 잠식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현관문을 열고 공용 공간을 향해 자신들의 빛을 내주었다. 재난의 현장이란 참혹한 삶의 한 페이지이면서도 인간성의 불씨를 확인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저마다 상황은 비슷해서 저장해놓았던 먹을거리를 풀어 요리한 것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무법천지라고, 치안이 좋지 않다고 해서 마음놓고 거리를 다니지 못하다가 사람들은 이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서로 연락할 수 없었으므로 안부를 물으려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고 차에 기름이 없다면 결국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달, 다음 계절, 혹 내년을 대비하며 냉장고에 쌓아두었던 것들을 이웃들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정전」중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도리어 갇혀버린, 그립고도 지긋지긋한 평원을 통해 후안 룰포가 그리는 멕시코 민중의 마음처럼 베네수엘라의 산지가 그렇게 헤수스를 통해 지금도 그려지고 있다. 모든 낡고 허약한 것들, 위태롭게 버티면서도 어떤 리듬 안에서 온기를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의 그림에서 본다. 우리에게 대개는 먼 듯, 그러나 아주 가끔은 눈앞에 다가온 듯 생생한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까.
---「민중성의 색채」중에서
카라카스에서 음식 준비로 거의 모든 가정이 분주해지는 때는 아무래도 크리스마스다. 보르헤스가 하버드대 방문 교수 시절 “미국인들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고독을 향해 가는 희생자들”이라고 말하면서 “중남미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 중 하나가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모이기를 즐기는 것은 중남미인들의 특성이라 할 만하다. 또 거기엔 음식이 빠질 리 없다.
---「먹는다는 것, 그리고 환대한다는 것」중에서
사르트르는 말했다고 한다, 타인이라는 지옥에 대해. 그러나 ‘완전한’ 타인의 땅인 신대륙에서 만나는 ‘완벽한’ 타인인 신인류 혼혈인이야말로 자아라는 거울에 갇힌,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류의 세계관을 깨우칠 신의 종소리 같은 존재라고, 이 역사적인 인물들은 기록으로 말하고 있다.
---「타인은 지옥일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