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차를 타고 가다 다른 차 뒷면이나 광고판에서 이런 문구를 흔히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혹은 예수)가 정답이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문구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되묻는다. “그러면 질문은 뭔데?” 나는 ‘그리스도’가 답이 될 수 있는 불경스러운 질문을 만들어 장난을 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이를테면 그들은 사람들에게 “방금 내 발에 돌을 떨어뜨렸다”는 뜻을 지닌 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많은 비그리스도교인이 이 구호에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런 구호들은 경솔하고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 같은,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많은 그리스도교인도 이런 표어를 보면 불쾌함을 느끼거나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까? 예전에는 일종의 속물근성이거나 취향과 계급 문제, 혹은 지식인의 오만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바뀌었고,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수록, 또한 내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경력 전체를 바쳐 성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내 바뀐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 p.17~18
이 책은 주로 개신교라는 맥락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둘러싼 질문들을 다루지만, 나는 신학자, 혹은 문화 비평가로서 글을 쓰지 않았다. 나는 신약성서 주석가이자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가,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분명하고 신뢰할 만한 답을 제시해 주리라 믿었던 분야에 속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초기 그리스도교 문서와 상황을 평생 연구한 다른 많은 학자는 공부하면 할수록 더 많은 질문이 생긴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쓴 이유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설명하기 위해서다. 또 다른 이유는 이렇게 질문이 많아진다는 것이 개탄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아는 신자들, 신앙생활을 오랜 기간, 깊이 있게 해온 많은 그리스도교인도 답보다는 더 많은 질문을 품고 있다. 더 놀라운 점은 그들이 ‘답’보다도 ‘질문’이 자신의 신앙을 더 잘 표현하고, 확신의 근거를 더 잘 가리킨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 p.20~21
길고 복잡한 지적 투쟁은 유럽과 미국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교적 감수성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개신교인들에게만 영향을 미쳤지만, 나중에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 더 나아가 종교적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과 무신론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와 그와 관련된 제목을 가진 책들은 이제는 너무 많고 흔해, 이와 관련된 새로운 질문들이 이전 세기의 위대한 신학 논쟁에서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를 사람들은 종종 망각한다. 오늘날에는 평범해 보이는 ‘역사적’이라는 말과 ‘예수’라는 표현은 모두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리켰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계몽주의의 혁명적인 사상가들은 예수가 아니라 신에 관해 질문을 제기했다. 인간 예수는 그들에게 질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추상적으로, 삼위일체 신학과 관련해 질문을 던졌다. ‘신성Godhead이 어떻게 인성을 취할 수 있는가?’ ‘어떻게 개별자the particular가 보편자the universal를 구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일시적인 것이 영원한 것을 드러낼 수 있는가?’ 누구도 이러한 질문들에 전기biography로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에 예수는 대중 종교의 중심, 경건한 호기심의 중심이 되었다. 예수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역사라는 믿음, 좀 더 구체적으로 근대적인 역사 서술 방식을 충족하는 예수 전기를 쓰는 것이라는 믿음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좀 더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관념과 그 방법론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 p.30~31
역사가들이 실제 예수에 대한 신빙성 있는 전기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예수가 역사를 만든 인물이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이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또 다른 ‘역사적’ 예수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예수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한 심상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 그리고 이 분투는 새로운 운동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분투와 자기-관여self-involving의 과정을 포함했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의미에서 해석 과정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작업은 언제나 세계를,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해석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는 성서와 전통을 놓고 자신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 p.49~50
그리스도교 담론에 바울이 남긴 가장 심오한 유산은 그가 자신이 들은 사건을 엄청난 생성력과 변혁하는 힘을 지닌 다목적 은유multipurpose metaphor로 변형시킨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모든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통제하는 권력관계의 중요성을 꿰뚫어 보았다. 바울은 이를 사회 이론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가정-공동체들house-communities, 특히 고린토에서 생긴 구체적인 지도력의 위기와 분열의 위험에 대한 대응으로 풀어냈다. 하느님의 능력이 십자가의 약함으로 나타난다면, 하느님의 지혜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메시아라는 어리석은 주장으로 나타난다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부유한 사람, 잘 교육받은 사람, 세련된 수사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 뜻대로 해도 좋다는 주장, 사회에서 “아무것도 아닌” 이들, “약한” 이들, 여성, 노예, 가난한 이들, 배우지 못한 이들이 그저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은 더는 진리가 아니게 된다.
--- p.168~169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이 신자들의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 가톨릭 교회의 위계질서와 맞섰듯, 계몽주의 영향권 아래 있는 학자들은 학자들의 정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개신교 학문 기관에 맞섰다. 그 결과 많은 교회에서 반지성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면, 많은 대학에서는 지적 반反종교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성서학자는 이 사이에 끼어 있다. 이러한 가운데 대학 밖에 있는 신자에게 전문적인 성서학자가 점점 더 세속학자처럼, 더 나아가 반反그리스도교인처럼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는 역사 연구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성서는 점점 더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과거는 우리 세계에서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세계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계와는 얼마나 다른지를 알아간다. 성서학자의 방법론적 회의론은 불신앙과 구별하기 어렵고, (당연히) 후자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대학에서 성서학자는 다른 학과 동료 학자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다른 학과에 속한 학자들은 성서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미신 시대의 유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 p.189